시 글 283

*이름 빼앗긴 꽃

휘발시킨 이름 아이디를 전설처럼 붙이는 마을 너는 '억새'라는 이름을 지어 받았지 벌 나비 전혀 세 들어 살지 않는 꽃에게는 이름을 지워갔다하네 혹 신명이 있었던 것일까 마을은 해였다 달이었고 별이었든지 꽃은 꽃은 다 꽃밭으로 키워내고 바람을 좋아하는 것들은 집 밖으로 쫓겨나 해 달 별 가는 길을 들여다보는 하늘 바래기이었습니다 족두리 올리는 일은, 부모 이름 지우고 마을서 얻은 이름 지켜가는, 너무 낯설어 '마동 댁'은 집이자 이름으로 평생이 되어버려서 암컷은 어둠이 커나가면 강가로 나와 하늘이 스러가는 길과 마을 샛길을 바꾸어 보곤 했습니다 해는 무겁고 흔들리고 싶은 여인이 찾아와 같은 풍경이 되어 알듯 모를듯한 말을 주곤 너의 몸에서는 배고픈 벼 이삭 냄새가 콤바인 날개에 갈리어 뿜어 나왔습니다 멀..

시 글 2022.11.02

물 때가 빠져 나갈 때

그림자가 두껍고 무거웠나 그런 날이었다 발바닥에 지쳐 묻어 따라온다 너도 아침을 잃었는지 봉은사 새벽 편경마저 울음이 얼었다 누가 아프다고 말하면 지나가는 강아지 목줄만큼이나 가늘었고 어덕 하나 허물어 짐은 이 밤을 지나는 무릎 통증이었다 해 놓았던 약속이 삭제되자 손발이 기다리다 손을 놓고 발을 잃어버린다 편지 한 장이 날아온다 언젠가 가을을 넣어두었던 시집 속 코스모스 꽃잎 아픈 색이다 그때는 산에 개미들이 버글 했다 붉고 파란 노란 채색과 톱니바퀴 붙은 신발을 신고 오르는 길이 여러 갈래였다 눈이 여럿 일 때는 이정표가 필요 없다 누군가 눈이 길을 뚫어 길을 낸다 어젯밤 길 잃은 달을 보았다 구름에 걸리고 넘어지고 구르다가 묻혀 버리고 만, 푸우푸 겨우 숨 쉬는 결이 숨어 파도로 나온다 물 때가 빠..

시 글 2022.10.06

선지국

*선지국 가난했던 끼니를 살아냄은 부쩍 자라나는 가족 먹성을 버티었다 마지막 피 한 방울 선지 신에게 바친 피의 제사였네 헌신이란 헝겊 조각은 내를 잘라 꿰매어 누굴 살려 내는 일 소머리 고기 꼬리곰탕 사골국 우족탕 갈비 내장탕 곱창구이 가죽 구두 마지막 선짓국을 받아 들고도 미각을 말하는, 헌혈 차량 빙 돌아 비켜 갔던 속내 그 이바지를 생각하면 송곳 해 지는 머리

시 글 2022.09.22

*보내드릴 참입니다

내 생각을 가져간 사람이 있습니다 나에게 아무 것도 해 줘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생각을 집듯이 가져갈 수 있나요 생각이 물건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편해집니다 주는 선물이 곱습니다 먹을것도 음악도 시집 한 권도 될 수 있어서지요 돌아오지 않으니까요 달이 호주머니로 오지 않고 보낸 연애 편지는 다시 우체부가 들고오지 않는 것처럼 오늘 이 가을도 다 좋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나의 시신에게 생각을 보내는 어떤 사람처럼 그러고 보니 물건을 생각이라 했던 생각이 아주 잘못 되었네요 시신이 물건이라니 무례일 것 같네요 죽어 있는 것을 보내는 건 가볍네요 물건이라서 살아 있는 건 보낼 일이 아니로군요 시신이 되고 말거니까요 내 생각을 가져가신 분 내가 보낸 분이 아니라 가볍게 회상만 해도 되는 분이라 가을처..

시 글 2022.09.20

우주의 술

나는 이름에 석과 율이 들어간 이름을 좋아했다 가장 안 좋아하는 천 자었는데 그게 내 이름에 들어와 있다 친구가 너의 이름을 보면 늘 감동해 우주를 움직일 것 같은 그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그는 나를 따라 술꾼이 되었다 일찍 죽었다 술 한 잔도 마시지 않는 나 그는 우주의 20 년 전 술을 어제도 마셨다 술이 내려왔다 둥근 지붕 위로 줄줄줄 형석을 만나는 날이었다

시 글 2022.09.18

처음

땅에 다리가 있는 걸 처음 알았어 신발을 신었고 보폭도 있었다 바람이 맞서면 주춤거렸고 뒷바람이면 빨랐다 느려질 때면 날이 더웠고 빨라지기 시작하자 가을이 왔다 키를 가졌고 몸도 가지고 있었다 보폭과 속도가 나와 똑같았다 힘이 들자 천천히 걷는다 텁석 주저앉자 같이 주저앉는다 앉아서 너 저리를 떨자 땅도 그리한다 재미있음은 같은 신발을 신었다는 점이다 오른발 왼발 바꾸거나 거꾸로 신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물며 군에 갈 때도 바꿔 신지 않았다 땅에 앉아 동구라미를 그렸다 똑같은 크기로 그린다 자전의 습관인지 들여다보았다 오늘은 언덕을 올랐다 언제 왔는지 내 발 밑에 와 있다 그림자가 말한다 나하고 두 분이 똑같네요 나는 말한다 넌 날궂이 하면 숨는 버릇이 달라 같은 거리를 터벅거렸다 종일 집으로 가기 ..

시 글 2022.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