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글 321

*모슬포에 있었다

떠났다는 말이란 뭘 말하는 건지 사실을 모르겠어 언제나 너는 떠나 있었다 가끔 만나 가평을 말할 때 빼놓고는 개구리 땅 속과 물방울 구름 속 같은 악수하는 순간 사라지고 나면 서로 잊고 사는 시간이 더 컸는데 우리는 친구였어 개망초 피고 백일홍 피고 살구나무 꽃피면 같이 피리를 불었지 네가 시험에 붙었을 때 너는 네가 붙었고 나는 내가 붙었고 같은 대문 열고 다녔던 직장 네 길 내 길 멀리 떨어진 달 같았어 휘파람 불면 떠오르는 달 말이야 네 내는 만나질 못하고 만나자 만나자고만 배부르게 불러댔지 왜 존경한다는 아버지는 어디다 두고 다녔던 거냐 네 딸이 오래 살다 가야 효부가 되는 거 잊었던 게냐 안방 떠나 문간 방 더 작은 방으로 옮겼다며 거리란 참 우스운 것이어서 내 달과 네 달이 떨어진 거리와 네와..

시 글 2022.12.21

*또 해를 넘겼다

해마다 철이 오기 전부터 다가오기 시작하면 날은 추워오고 심란했다 김장 김치 맛은 양념 맛이라서 빈 구석 맛의 여백을 찾는 혀가 이때는 바쁘다 '어때' 라는 말은 짠지 매운지 맛이 살아있는지 감칠맛이 나는지 시원한 맛이 들어있는지 시간 지나면 좋은 맛이 될 건지를 묻는 양념같이 어려운 단어다 이보다 해석하기 어려운 시간은 없다 싱겁거나 심심하거나 그런 맛이야 그럼 신안 천일염을 조금 더 칠까 아니 백령도 특산 까나리 액젓을 살짝 넣자 갓 올라온 재료가 맛을 내는데는 양념들도 서로 부러워해 비가 찬 이랑 물에 뿌리부터 물이 밴 올 배추나 무는 무맛이었다 자연의 변덕은 본 성질을 바꾸고 부족한 맛을 채울 질 높은 재료를 챙겼다 춘천 강릉 광천 영양 해남 소래 신안 백령도... 바다와 산이 쓸려 들어갔다 머리..

시 글 2022.12.15

지내보면 알게 될 겁니다

오늘을 건너뛸 수 있다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조선왕조 임금을 면회할 수 있을까 어제 빨랫줄에 걸어놓은 달을 걷을 수 있을까 혼이 다 빠져나간 건너는 일은 이승과 저승 같아서 삶에 약속은 없었으니 나비의 날개를 원했는지 모릅니다 지금 내가 또 내가 언어의 걸음 속으로 건너가고 있습니다 시냇물이 모양을 바꾸듯 눈이 밟은 아침 안개가 숨 쉬러 나왔네요 경계를 형성하려는지 보이려 하는지 하루를 지내보면 알게 될 겁니다 오늘을 건너뛰어

시 글 2022.12.01

귀의 가난/손택수

소리 쪽으로 기우는 일이 잦다 감각이 흐릿해지니 마음이 골똘해져서 나이가 들면서 왜 목청이 높아지는가 했더니 어머니 음식맛이 왜 짜지는가 했더니 뭔가 흐려지고 있는 거구나 애초엔 소리였겠으나 내게로 오는 사이 소리가 되지 못한 것들 되묻지 않으려고 상대방의 표정과 눈빛에 집중을 한다 너무 일찍 온 귀의 가난으로 내가 조금은 자상해졌다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손택수 시집에서 (쉽고도 호흡이 너무 좋아서 보내 봅니다)

시 글 2022.11.28

존재가 귀해졌기 때문입니다

*존재가 귀해졌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바라보는 느낌을 받았을 때 나를 영혼의 한쪽이 머리 뒷 켠에 멈춰 서 어머니 생각에서 돌아온 것처럼 가지고 왔습니다 당신의 허파 한쪽에 다녀온 듯한 창이 퍼덕였습니다 붓끝 굶주림을 띄우려 해도 나지 않는 숙연함은 처음이 깨어질까 말림 때문만 아닐 겁니다 그 애잔 떠 심장에 심어 살아나게 싶어서입니다 그리워했을 따뜻해했을 삶을 다독일 은밀한 운치의 시선이었기에 기도합니다 당신, 남은 허파에 보낼 허기진 기별을 세상은 참 갸륵도 합니다 짧은 순간이 움직여 내는 파고가 오랫동안 당신을 기억할 내 존재가 귀해졌기 때문입니다

시 글 2022.11.21

빈 곳

늘 빈 곳을 차지한 긴 발화 말복 밭 골 찬바람 부채이었고 언덕 이마에 서릿발 한 줌 뿌려 준 누군가 널 부르면 먼 곳 한참 비켜보던 바람 초가집 뒷뜰 한켠에 서 있던 개망초 또 누군가의 가장 비천한 존재로 덪을 씌운, 인간을 사랑하는 가슴 브로찌 계절이 소멸되지 못함은 되지 않는 이름 붙인 손을 떠난 바람 때문, 겨울도 지탱하는 나무가 못 되어 한을 여름내내 풀고 살았는지 모릅니다 빈 자리 찾아 나선 행선은 또 어느 시인의 뜸질 메꾸시려고 차림 하셨는지요

시 글 2022.11.19

*이름 빼앗긴 꽃

휘발시킨 이름 아이디를 전설처럼 붙이는 마을 너는 '억새'라는 이름을 지어 받았지 벌 나비 전혀 세 들어 살지 않는 꽃에게는 이름을 지워갔다하네 혹 신명이 있었던 것일까 마을은 해였다 달이었고 별이었든지 꽃은 꽃은 다 꽃밭으로 키워내고 바람을 좋아하는 것들은 집 밖으로 쫓겨나 해 달 별 가는 길을 들여다보는 하늘 바래기이었습니다 족두리 올리는 일은, 부모 이름 지우고 마을서 얻은 이름 지켜가는, 너무 낯설어 '마동 댁'은 집이자 이름으로 평생이 되어버려서 암컷은 어둠이 커나가면 강가로 나와 하늘이 스러가는 길과 마을 샛길을 바꾸어 보곤 했습니다 해는 무겁고 흔들리고 싶은 여인이 찾아와 같은 풍경이 되어 알듯 모를듯한 말을 주곤 너의 몸에서는 배고픈 벼 이삭 냄새가 콤바인 날개에 갈리어 뿜어 나왔습니다 멀..

시 글 2022.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