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글 321

달빛 언어

심부를 갔다 그냥 돌아와 답을 하지 않은 채 얼굴만 만지는 빈방처럼 먼저 퇴직한 친구가 좀 보자고 초봄 찻잎 얼굴을 가지고 왔다 간을 토끼의 주머니에 넣어 살고 있다고 했던 말하는 그는 이 세상에 없어 보이는 사람 같았다 어느 경전도 따라잡지 못한 번짐 없는 입, 짐이라고는 하나도 없어보이는 어깨 색이 없는 말에는 끌어당기는 힘이 방안 가득했다 부탁도 청도 아닌 과거들이 나열 앞에 따습게들 모여들었고 그가 남기고 간 공간은 생의 시작과 끝 어디쯤이라기보다는 갚을 수 없는 빈 자유로움이었을까 서로 잡아당기는 이해는 같은 것이라도 느낌의 차가 한이 없다고, 바람이 일어서고 가라앉음도, 밀려오고 쓸려가는 바닷물도 깊음이 물길따라 다르다고 달빛 같은 말을 듣고 있었다 상처의 이쪽과 저쪽 사이를 쉽게 넘을 수 있..

시 글 2024.01.31

그러고

지금이 황혼인가요 나는 나이를 말할 줄 모릅니다 계단이 있어 통하질 않으니까요 똑같은 바람이 불어와도 똑같은 물결이 밀쳐도 왜 서먹하지요 내가 높은가 봐요 아니에요 뱃속이 비어서예요 2년이 넘었거든요 그때마다 계단을 올랐어요 우린 언제 통할까요 바람을 넣어보고 싶어요 바다를 삼키고 싶어요 그리고 전화를 할 겁니다 이젠 상관없어요 바람도 바다도 왜 그걸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다 나를 빼면 서운하거든요 내가 가겠어요 당신에게로

시 글 2024.01.26

소프라노의 눈치

입술을 오므리는 건 공기를 끌어내기 위한 혀의 작전 바람은 파란 파동이 되어 담을 턴다 노래는 주변 소리들을 삭힌 특별한 친서 애써 닿으려는 팔은 담장 건너 긴 머리 노래에 약한가 봐 그녀는 파랑에 꼬리표를 달고선 묻고 답한다 추파일까, 간절일까 늦지 않는 끌림은 답이 먼저였다 검정 머리 찰랑 기름기 흐른 눈망울 진달래 물이 도는 낯빛 콧김만 왜 탱탱한지 오늘따라 우글대는 속내를 깨물게 하고 있다 꺼내야 할 입술이 숨어버릴 때쯤 눈치는 눈이었다 날 때부터 지닌 촉 어서 말해 지금이야 강을 건너는 소프라노의 촉촉한 윤기 엉겼던 걸음 사뿐, 흔들바람은 산들 어깨는 푸드덕, 키가 날고 있다 어느 가수의 '휘파람을 부세요'를 들은 적이 있다 수천의 자양분이 든 우림의 숲은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처럼 쿵쾅 두근 ..

시 글 2024.01.12

마고의 시간

거울 속의 내가 나를 본다면 과학이 필요하겠지, 인공지능은 해 낼 수 있을 거야 그럼 내가 보고 있는 세상이 나를 보는 것처럼 출연한 영화를 내가 보듯이 가끔 시간을 돌리고 싶을 때 가지고 간다 그 연장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던 빛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다가 멈추면 바로 그 점이 지금이었다는 걸 내가 파고드는 놀이다 그건 빛의 이야기잖니, 시간 이야기를 하고 자 하잖아 아유, 은유라는 걸 왜 배웠게 어머니가 보고 싶으면 마찬가지야 어머니 일상을 다 가져다가 비춰줘 봐 어머니에서 마고할미까지 살아 돌아오실 걸 거 봐 시간이 바로 우리 앞에서 나오잖아 시간이라는 거 흐름이 아니라 사물 속에 숨는 거 네가 가진, 본, 경험한 모든 것에 박혀 있어 꺼낼 수 있는 길은 바로 너뿐이야, 네 인생이잖니 시간이 자..

시 글 2023.12.27

길 없는 길

산책을 하다가 침을 맞았어요 따끔할 거예요 자국이 자꾸 흐렸다 그럴 땐 도서관을 들락였다 핸드폰 속에 꽂아 들고 다니기도 했다 누구는 빗물에 쓸려가는 낙엽에 가 보라 했고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가 돼라 했다 세상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는 복사판이라서 정착지를 얻지 못했다 정말 침을 맞았다 걸을 수가 있었다 바늘이 시를 찔렀다 그는 말했다 길은 당신이 가지고 있어요 도움말은 비슷비슷했고 맞는 말일수록 애매했다 차라리 '죽어 그러면 살 거야'를 듣고 싶었다 셧터를 누르세요 이렇게 공중을 날으는 바람이 소리로 보일 때까지 외침하나 잡고 걸어가고 있다

시 글 2023.12.08

대지라는 어머니

당신을 보고 있습니다 바람이 어떻게 살갑게 살랑거렸는지 햇빛이 어떻게 잎으로 눈이 되게 해 주었는지 어떻게 땅이 당신을 세워 주었는지 지금 왜 춥다 말하지 않는지 가을을 마름으로 매듭하고 겨울을 대나무처럼 꼿꼿히 견디어 봄을 어디에 피울 지 준비하고 있는지 잎이 땅에 수 놓은 숨결과 눈오면 마중할 어깨 동무를 어느 촉촉한 봄의 날에 순명으로 돌아갈 대지에 엎드리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ㆍㆍ 또 내제된 봄을

시 글 2023.12.05

대지의 언어

당신은 참 잘 살아오셨더군요 땅에서 자라 퍽이나 먼 인연 같지만 나를 화폐와 바꿀 때부터 당신을 싱싱하게 보았어요 양픈에 넣고 깨 벗겨 하얗게 목욕시킬 때 태양을 향해 자란 엽록체 팔을 자를 때에도 생명이 교환되어 가는 과정과 가족 미각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지금을 말리려 맹 추위에 매달아 놓았어요 깔끔한 기도하는 품성을 보았지요 나는 잘 견딜 거예요 가지런한 당신의 다음 손을 기다리고 있겠어요 서릿발이 되었다 녹았다 봄이 지나면 야들해지고 작년 V자 편대 가을바람과 비, 햇빛과 땅의 습을 따끈한 국물로 뜰 수 있도록 된장을 풀 때 휘저으면 대지에서 받은 향을 당신께 선물할 수 있어서 고맙다는 말이라는 걸 떠올려 주세요 감사해요

시 글 2023.11.29

동백꽃

말을 하고 싶구나, 지금도 구석진 자리에서 몸에 물기가 돌고 덜 바래졌을 땐 뜨끈한 인절미도 품어내곤 했었는데 전기 들어오고 방앗간 돌리더니 치마폭 새색시도 어매 할머니도 눈 여김 한 번 주지 않더구나 가끔은 친정온 큰딸이 애환도 끌고 오고 손주 이쁜 짓도 귀에 걸어 그네도 태워주더니 세월 커가면서 시댁이 우리 집이라고 곡간 열쇠까지 보여 줬잖냐 기특도 하고 서운키도 했단다 어매가, 딸 하나 잃어버렸다고 나도 이상한 세상 만나고서부터 살도 빠지고 떡메 쳐 주던 삼돌이도 장가가 버렸고 입 주둥이만 벌이고 있으면 뭐 하냐 쌀 한 톨 먹여 주는 이 없으니 바짝 말라 옆구리마저 터지고 말았지 근데 세상 알 수 없어야 어느 날 나를 비싼 가격으로 사가겠다고 귀한 집에 얼굴 성형까지 시켜서 모시고 살겠다고 재수 맞..

시 글 2023.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