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글 283

판옥선(이순신)

역사는 흐린 낯으로 떠 내려갔나 목을 내놓은 사명은 하늘에 닿아 뜻을 헤아린 해구는 방패처럼 몸을 던져 막아섰고 바람 한 결 구름 한 점 허위 됨 없이 머물러 주었다 물결 일어서서 바다를 갈랐다 떨쳐나선 백성은 칼 창에 찢겨도 나라 앞에 성이 되어 돌이 되어 함성이 되어 피로 던져 외침의 낙엽이 될지라도 옥하나 둘러싼 사각은 돌과 물과 초록을 견디었다 언제나 그러듯이 깃대를 잡으려는 빈 입은 후대에 넘어졌고 곧은 붓은 첩으로 남아 아무도 막지 못할 역사를 새겼다 충은 누구도 두려운 법 그 거침 앞에서 비켜 서려는 간신들 판옥선은 떠 구멍 속에서 지켜보고 있다

시 글 2022.09.07

잠실 주공 2단지

네 시경에 오실 수 있으세요 시간은 목이 매이게 된다 빨래를 걷다가도 짓는 밥이 뜸이 들다가도 투벅투벅 신발 끌리는 소리가 동공에 밟힌다 양손 집게에는 8장의 연탄이 빠득빠득 쌓여 올려진다 5층은 중력과 거리와 시간이 지폐과 바뀌는 높이 4층과 5층은 검은 머리와 힌 등뼈가 걸쳐 있었다 갑자기 5층이 1층과 하나가 되었다 검은 가정이 보였다 그때부터 아린 꿈트림 1층은 무릎이 우는 습관을 꺼낸다

시 글 2022.09.04

동양화

*동양화 강물에 깊이 뿌리내린 안개 가을은 산수화를 좋아합니다 흔들리고 날아가지 않으려는 오전이니까요 바탕이 중요시된다는 그림 너무 또렷한 사진은 멀어지고 흐려진 것은 차츰 자신을 찾아갑니다 그림을 찾는 그림의 방식입니다 그림자와 대상을 섞어내는 것이지요 경계가 애매할수록 동양화는 알아줍니다 없는 것을 보이게 하는 방식 산에 검은 물감을 문지르고 강에 가루를 뿌리면 부풀어 일어서는 안개 안개꽃 여름 아랫도리 통증을 삭혀내고 가을 산천은 생동합니다 빛은 하양입니다 안개는 백지입니다 검정에 대항하려는 속성이랄까 땅과 강과 산과 하늘의 뿌리 어쩌겠어요 그 길은 흑암 없이는 동양에선 살 수 없는 걸요 가을 안개가 깊어 갑니다 쉬이 떠나려 하지 않습니다

시 글 2022.09.01

차 한 잔

낮 동안 세탁해 걸어두었던 해가 물이 많이 빠졌다 천연 염색이란 게 저런가 보다 싶어 걸치고 싶은 색이 둘 쯤 생겼다 색이란 어둠처럼 빛이 아니고선 나오질 않는 비밀스러운 것이리라 몇 개의 패스워드로 사는 세상 비밀은 가족도 모르는 고독을 가지고 네 개의 방마다 걸어둔 키 덕으로 한 지붕 네 가족으로 사는 세상 민속촌 한옥 찻집에서 차를 마시면 하늘에 원두막이 생긴다 한 숨 자고 나니 양반 어르신네 잠이 깊어 천국을 깨우지 못했네요 합니다 가보지도 보이지도 않는 천국을 믿으려니 구석진 공간 하나 생기고 시집도 중간에 페이지 하나 비워두어 쉬어가라고 하는데 걸음을 쉬어야 할지 인생을 쉬어 멈추면 영원할 테고 알듯 말듯한 삶이 불러 내는데 끄억끄억 끌려가는지 점점 힘이 듭니다 상상은 날아다니고 kg은 점점 ..

시 글 2022.08.24

여름 일곱

짝을 털어낸 더위 토한 소리가, 떨어진 느티나무 밑 젓가락 집고 건져낸 울대들 유리병 속에 넣어 둔다 7 년을 셈하는 종각 종소리도 잠이 들 시간 연말이면 해마다 소리들은 종 3 거리로 모여들고 붙인 배꼽에 밴드 하나 갖가지 소원들은 색깔 소리가 나면 매미의 한 해를 감하고 떨었던 밴드에 알코올을 붓습니다 그 소리는 소리가 아닌 에밀레 레는 자신을 찾는 유년의 언어 일 년 하루 개방한다는 봉암사는 그날 하루만 운다는 매미 줄 떼 지어 하안거 이레를 더 견뎌 부처를 만나라네 그래도 별 일 아니란 듯 배고픈 유충들 칠 년을 도는 새벽 돌탑 약속은 걸릴 것이고 배꼽 닫혔던 유리병 속 성대는 소리 일곱을 손가락으로 꼽을 겁니다

시 글 2022.08.15

거울

어서 오세요 설흔 하나의 아침 당신을 가지고 오셨군요 오늘은 날이 환한가 보네요 나는 점쟁이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내가 가면 뛸 듯 기뻐들 합니다 왜겠어요 산과 들 바다 볼 수 없었는 신기한 자기 모습을 처음 보게 되었으니까요 바람만 섭섭해하지요 이럴 땐 신에게 투정이 폭풍으로 바뀝니다 그러다 심한 것 아니냐고 말듣고 멈추지요 태양계를 보셨나요 팽이처럼 돌아가는 해와 수금지화목토천혜명 위성들 약혼반지를 낀 토성이 에머랄드 지구와 견주자고 하네요 우주 끝을 보여 달라고요 바다 끝을 가 보고 싶다 했지요 지금 서 있는 곳이 그 끝이랍니다 물러설 수 없는 아름다운 수채화는 제게 매일 달려 오는 선물입니다 어서 오세요 설흔 하나의 오후 당신을 가지고 오셨군요 직장에서 내상을 입으셨나 봐요 껍질을 벗기면 알 수 있..

시 글 2022.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