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글 283

선재길 늦바람 불어

좀 되었던 월정사 바람이 들어 본 적 없는 절 독경 소리 새어 들어와 났다 말았다 한 사찰이 끌어당길 때 이름에 목을 걸고 없는 사람 찾으러 헤매 나선 적이 자꾸 쌓였어 봄 절간은 기와불사 주문을 피해가면, 있어야 할 연을 묶지 않는 낭떠러지 흔적 하나를 떼어 버리는 어리석음에 빠질 거 같아 예정된 처사라도 되는 듯 줄 섰었지 이 일 때문이었어 바람이 그렇게 살랑거렸던 건 기와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띠 두르고 서까래 위로 올라가고서야 봄바람이 할 일 했다는 듯 차분해졌다지 길 위에 꽃이 피어 발걸음이 앞을 서고 양팔 들고 오늘 너는 자유라고 외쳐 혼자서 가는, 길 없는 길 될까 늘 서늘한 구석으로 남은 선재길 벌어진 입이 눈꼬리 마냥 찢어지고 단단한 다짐이 끌어낸 맨발 이십 리 산 길이 어이 치받고 올라..

시 글 2023.04.24

중절모는이렇게 왔다

*중절모는 이렇게 왔다 들락거리는 아픔의 문턱엔 높낮이가 있었는지 무릎까지 내려와 고개 숙인 중절모 어긋났는지 불편이 맞는다 하회탈은 안면 바꿔 산다더니 양 날개 나비처럼 깃 세우고 눈썹 보일락 말락 깊숙이 청진기를 바라보는 너 인텔리, 부자 양반쯤으로 여겼는지 침 한 모금 삼켜 헤아려 받는다 쎄일된 원형 모자 하나 손주 초등 교장도 인사가 수그러지고 공손한 언어를 모자에 올려, 맞는 종교 여기나 저기나 높이 성벽이 된, 중절모엔 든 따뜻한 체온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시 글 2023.04.16

매듭들

매듭 참 짜증이다 시장 검정 비닐봉지 꽉 다문 입 풀려는 손톱 끝보다 가위로 잘라버릴까 끝까지 풀어낼까 갈등이 번데기 좋아하는 옆지기 씻고 삶고 물 빼고 소금 넣어 볶아 놓았더니 한 숟가락도, 미더워서나 감격해서나 시험 삼은 날 작은 유리그릇 두 숟갈 질러 넣었더니 안개 낀 남산 벗어나듯 맑게 개어있다 참 그렇다 손자 젖떼기 꼭지처럼 그 순간 간지러웠을까 아팠을까 울 할머니 시집 안 가겠다던 딸애 고행 여행 가던 날 아침 매듭바람 시원했을까 벌써 기다려졌을까 어미 낮 살은 중도층 꽃 매듭진 낙화 자리 목련 빨갛다 매듭은 자르지 말고 풀어야 복 들어온다 귀가 운다

시 글 2023.04.07

박쥐

매달려 본 적 있으신가요 무언가에 무게를 자유롭게 날개로만 부채질하는 구름이나 가능할까 달을 떨어지는 끝에 거꾸로 매달려 사는 새가 있다 중력을 인정한 유일한 호롱불 신념 그가 말합니다 땅바닥에 다리를 매달고, 사는 두 발 짐승 중력을 헤집고 못 빠져 나와 피곤해 진 허리 목이 긴 기린도 물마실 때 주둥이를 중력 쪽에 둔다지요 수양 버드나무 가지 들이킨 내장 거꾸로 매달린 무게에서, 가볍게 해탈 하늘하늘 바람 날개로 와 그네 태워주고 중력은 상하를 바꾸면 평편한 저울 바늘이 될까 무거운 언어를 결에 실어 가벼히 날리는 내리 뻗은 줄가지들 평생 매달려 자유를 얻는 새, 박쥐 중력을 거스른 바람처럼 날리는 치마처럼 오늘을 비행한다

시 글 2023.04.03

붙잡아 가소서

하늘을 잡으러 교회에 갔습니다 물고기를 잡으려면 베드로의 투망이 있어야 요셉의 꿈을 꾸면 하늘도 가능할까요 잡는다는 것, 누구에게 붙잡힌다는 것과 같은 상반수 잡을 수도 붙잡힐 수도 있다면 수수께끼 같은 꿈일까요 인생처럼 손바닥을 모으면 잡을까 주려 엎드려도 보았습니다 빠져나간다는 것 빠져나가지 못하는 게 있다는 말 투망을 내 걸었습니다 그곳에 인침을 붙여 놓습니다 두 팔을 벌입니다 붙잡아 가소서

시 글 2023.03.25

뻐꾸기 들 산 날아

향 꺼내 봄을 피워낸다는 매화 속에 얼음 삭이고 나온 개울물 소리 속에 갑자기 총각 너른 들판에 노래가 있었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그 앞 개울 어덕에는 2월이면 나팔 동백이 입술 동그리고 순결 찾아다닌다는 봄 철새 따라 아지랑이 돌아올 기척 가까웁고 고니 경안천에 날갯죽지 힘 기르려 철을 못 떠나고 남쪽 아랫목 온기에서 꿀은 트럭에 날려 북으로 시간을 타는 비행이 바빠집니다 바닷물 순간에 들어차고 목욕탕 물 한꺼번에 올라오듯 동백 복수초 매화 개나리 변산 바람꽃 산수유 목련 벚꽃 울긋한 바다가 거품처럼 올라옵니다 언덕 근처 종달이 공중 짝짓기 신음 안으로 들어다 볼까요 뭘 잘못 찾고 있나 봐요 삼월 삼짇날 처마 둥지 찾아온다는 박 씨 소식 물고 올 제비를 만납니다 찾을 게 너무 많아 봄 ..

시 글 2023.03.22

나이 든 하루

네가 아픈 신호를 보내왔지 아버지 전립선 비대증처럼 자꾸 끊기는 것이었다 진공관 라디오 회로를 구성하던 푸르름은 캄캄한 손톱 속으로 들어가고서 블랙박스가 된 세계 IT 전공을 어디에 두고 다니냐는 하늘 같은 딸 스윗치가 치과의사 이빨 바꾸는 방식이냐고 널 달은 애 하나를 골랐다 진단보다 앞서는 건 X-ray를 찍어두는 일 입과 똥꼬 사이 끊긴 회로를 수술하고 S•W를 off하니 환해지는 화장실 거꾸로 해도 켜지는 전공 회로란 왔다 갔다 깜박이는 이어지면 풀리는 신경통 찍어둔 사진 하나, 잃었던 하루를 베껴 살린 잔소리, 타박 견딘 귀찮아 진 전공

시 글 2023.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