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글 282

발바닥 가운데가 왜 오목한 지 (한강 생태공원 한 바퀴)

발바닥 가운데가 왜 오목한 지 (한강 생태공원 한 바퀴) 비 그친 뒤 땅은 빨랫줄에 방금 연 옷처럼 여름을 물고 땅의 근육과 핏줄을 끌어 쥐고 있다 바닥을 딛고 선 맨발 하얀 개망초 열 송이 발끝에 피워내고 밟히지 않으려면 길을 내 주거라 숲은 하늘 닫은 오솔길에 구불구불 골목길 터 주었네 가끔은 물웅덩이 세족탕을 파 놓고 조심을 파종한다 심심했던 지 길 동생 밴 어머니 배처럼 빙 돌아서 나오게 하고 여섯 달만큼 길을 늘여놨다 까치밥 된다는 찔레꽃 씨앗 아직은 푸른, 겨울 색을 고르는 중 작년에 보았던 고라니 오줌발 옆 노루오줌꽃이 대신 피어 하늘에 선물한다 살빛 브로치를 오솔길 가로지르는 작은 뱁새들 한 방향 가는 길에도 여러 길이 있다고 이쪽저쪽 파고드는 쪽숲 어둠은 소리를 집어먹고 그림자를 훔쳐먹고..

시 글 2023.07.11

느티나무 교실

알림 선생님이 저 새는 무슨 새에요 묻습니다 으응 두루미 아니에요 학생이 답합니다 그래요 두루미 성내천 물이 발목을 잡고 긴 고개입에 물고기를 던져주어 사는 두루미 이야기가 나온다 생각 선생님은 사랑 마크가 뚫린 플라스틱 책받침을 가지고 다니는 학생들에게 모과나무껍질에 책받침을 대어 주고 뭐 같아요라고 묻는다 얼룩송아지 같아요 기린 같아요 그럼은요 얼룩송아지 기린 좋아요 질경이는 질경이 밤송이는 밤송이 끝에 찔리는 가시가 달린 네 잎 클로버는 행운이라는 두 글자가 추가된 행운의 네 잎 클로버로 명명되었다 어둠을 들이쉬기 시작할 때 숲은 손전등을 켠다 나방들 숲 사이에서 별이 되고 달이 되고 반딧불이가 되고 알림 선생님은 알림 선생님이 되고 생각 선생님은 꿈 선생님이 된 밤 사이 우주가 떠다닌 푸른 숲꿈이..

시 글 2023.07.06

바꿔치기 한나절

걸망 매고 판 벌린 한나절로 가는 길 동네 젊은 친구 둘 담배 한 대 물고서 야 사는 것이 친구를 만나는 것인 것 같아 그럼 나는 뭐지 담배 맛만큼 쓰다가도 모를 안정감에 속고 있다는 듯이 비벼 끄고 오후에 비는 쏟아 붓겠단다 먹고 마셔야 산다는 한의학 박사 배 넷 바나나 3 단 당근 두 봉지 브로콜리 두 덩이 비트 한 바구니를 만나러 나절 시장은 살리려는 것들을 바꿔 주고 있다 구름은 살려 비로 바꿔치기 하고 나는 살리려 주스를 갈고 살아 있음을 글로 바꾸고 있구나 바꿔치기 한 나절이다

시 글 2023.06.23

사라진 것들

어느 날 큰 불덩이가 태양계를 모두 삼켰다 그 안의 생명체나 무생명체는 모두 불에 녹아 없어졌다 점보다 작은 빈 공간 하나 우주에 생겼다 원하던 이데아는 어디로 갔을까 땅을 파던 손발은 어디로 갔을까 신은 어둠이 사라진 것처럼 사라졌다 이 우주는 전혀 관심 없었고 그러기에 어떤 미동도 없었다 인간과 자연과 신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무슨 의미들이 살고 있었던 걸까 우주는 무슨 의미들로 이루어진 걸까 사라질 것들인가

시 글 2023.06.14

한 이불 속 들어갈 때

한 이불 속 들어갈 때 그와 나누는 대화를 독백이라 합니다 둘이 속삭이려면 벽에 기댈 때 높이가 맞습니다 어떤 배경 이야기든, 예를 들면 아름다움 고통 지식 종교 등 그는 변색하지 않는 평등심의 소유자로 나옵니다 가끔 자전거를 타면 특별할 수 있어요 따라다니며 바퀴를 돌립니다 나는 무동력이 되는 경지를 맛보게 되지요 혹 배를 탄다면 검은 고래 한 마리 배 아래 희뜩번뜩 찰싹 붙습니다 늘고 줄임에 자유로운 길이 나와 같은 키 재기 들어도 입이 없고 보아도 전함이 없는, 먹물 찍어 산수 그려 내는 동양화가랄까 발뒤꿈 물고 사는 천성은 꼬리달린 신의 신봉자 여서일까 죽음이 영원한 거라면 순간 든 낮잠의 그림자 같이 걷고 먹고 한 이불속 들어갈 때 고스란히 한 몸의 이야기가 됩니다.

시 글 2023.05.30

새 아침을 주문하다

목성에서 아침을 일어난다 부피가 크면 일어서기 힘들어서 물속에 넣은 소금이 된 가죽옷을 입고 일어난다 억지 밥을 소리라도 맛있어지라고 꼬꼬 꼭 씹어 삼켜 본다 목구멍이 헛발질을 케캐 캑하고 하루를 견뎌 낸 짠 땀이 눈 안에 뻐걱뻐걱 레슬링 한다 오늘을 둘러보니 어제 만치 벗어날 길은 다닐 곳에 숨겨져 있다 때마침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이론가 시클롭스키를 만난다 일상을 벗어난다는 거 새롭게 하기일 뿐이다 잠깐의 외출은 돌아오면 목소리 잠기듯 들어가고 일상은 일상이 되고 있다 목구멍이 바이어린을 켜고 뻑뻑한 눈이 함박눈을 맞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목들 형식을 일 년에 한 번은 벗어나 현실과 맞닥뜨리는 다른 지혜를 가지고 있었네 목성을 탈출하기란 이목구비를 어디에 두고 부릴 것이냐에 집중을 해 보려 하는 새 ..

시 글 2023.05.26

밤을 한 입에 삼키는 법

*밤을 한 입에 삼키는 법 바람이 불렀을 때 하품을 하고 있던 어둠이 밤을 한 입으로 삼키자 밤은 곧 어둠이 되었다 바람에 강한 어둠 세상엔 너에게 꼼짝도 않는 게 있지 했다 바람의 묘수를 알기나 했을지 어둠을 품어 낸 거야 밤이 맞도록 샛별의 눈이 흐려지는 시간 아이는 살았고 산고 끝 어미는 사라져 갔다 어둠이 출산을 한 거야 맑고 밝은, 바람이 모처럼 살랑거리는 아침을

시 글 2023.05.19

Endless 전쟁

*Endless 전쟁 다섯 살 어느 날 이사 갔던, 지금 내 고향 토방이 나지막한 늙은 호박 같던 집 재혁이가 싸움을 걸어왔다 터를 중요시하는 고양이 동네 한 바퀴 돌고 오다 영역 침범 범이라도 된 나 염탐꾼 검색의 찢어진 눈 학교에서 만나면 기를 꺾으려는 보험용이었을까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폼을 잡았다 우리 땅 한 발자국도 딛지 못하게 할 것처럼 망치로 못질한 발바닥 캥거루 달음질로 왔다 역사가 긴 동네일수록 울타리 경계를 넘은 호박은 말뚝이 박혔고 냇물 목간하는 여자아이들 팽나무에 올라 보초를 서는 일들이 행했었지 여름 달빛마저 잠을 자고 있을 때에도 팔레스틴은 이스라엘 호미 끝 같은 창을 피해 땅굴을 파고 들어가고 있었다 그건 풀들의 Endless 전쟁이었다

시 글 2023.04.30

선재길 늦바람 불어

좀 되었던 월정사 바람이 들어 본 적 없는 절 독경 소리 새어 들어와 났다 말았다 한 사찰이 끌어당길 때 이름에 목을 걸고 없는 사람 찾으러 헤매 나선 적이 자꾸 쌓였어 봄 절간은 기와불사 주문을 피해가면, 있어야 할 연을 묶지 않는 낭떠러지 흔적 하나를 떼어 버리는 어리석음에 빠질 거 같아 예정된 처사라도 되는 듯 줄 섰었지 이 일 때문이었어 바람이 그렇게 살랑거렸던 건 기와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띠 두르고 서까래 위로 올라가고서야 봄바람이 할 일 했다는 듯 차분해졌다지 길 위에 꽃이 피어 발걸음이 앞을 서고 양팔 들고 오늘 너는 자유라고 외쳐 혼자서 가는, 길 없는 길 될까 늘 서늘한 구석으로 남은 선재길 벌어진 입이 눈꼬리 마냥 찢어지고 단단한 다짐이 끌어낸 맨발 이십 리 산 길이 어이 치받고 올라..

시 글 2023.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