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글 280

그러고

지금이 황혼인가요 나는 나이를 말할 줄 모릅니다 계단이 있어 통하질 않으니까요 똑같은 바람이 불어와도 똑같은 물결이 밀쳐도 왜 서먹하지요 내가 높은가 봐요 아니에요 뱃속이 비어서예요 2년이 넘었거든요 그때마다 계단을 올랐어요 우린 언제 통할까요 바람을 넣어보고 싶어요 바다를 삼키고 싶어요 그리고 전화를 할 겁니다 이젠 상관없어요 바람도 바다도 왜 그걸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다 나를 빼면 서운하거든요 내가 가겠어요 당신에게로

시 글 2024.01.26

소프라노의 눈치

입술을 오므리는 건 공기를 끌어내기 위한 혀의 작전 바람은 파란 파동이 되어 담을 턴다 노래는 주변 소리들을 삭힌 특별한 친서 애써 닿으려는 팔은 담장 건너 긴 머리 노래에 약한가 봐 그녀는 파랑에 꼬리표를 달고선 묻고 답한다 추파일까, 간절일까 늦지 않는 끌림은 답이 먼저였다 검정 머리 찰랑 기름기 흐른 눈망울 진달래 물이 도는 낯빛 콧김만 왜 탱탱한지 오늘따라 우글대는 속내를 깨물게 하고 있다 꺼내야 할 입술이 숨어버릴 때쯤 눈치는 눈이었다 날 때부터 지닌 촉 어서 말해 지금이야 강을 건너는 소프라노의 촉촉한 윤기 엉겼던 걸음 사뿐, 흔들바람은 산들 어깨는 푸드덕, 키가 날고 있다 어느 가수의 '휘파람을 부세요'를 들은 적이 있다 수천의 자양분이 든 우림의 숲은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처럼 쿵쾅 두근 ..

시 글 2024.01.12

마고의 시간

거울 속의 내가 나를 본다면 과학이 필요하겠지, 인공지능은 해 낼 수 있을 거야 그럼 내가 보고 있는 세상이 나를 보는 것처럼 출연한 영화를 내가 보듯이 가끔 시간을 돌리고 싶을 때 가지고 간다 그 연장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던 빛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다가 멈추면 바로 그 점이 지금이었다는 걸 내가 파고드는 놀이다 그건 빛의 이야기잖니, 시간 이야기를 하고 자 하잖아 아유, 은유라는 걸 왜 배웠게 어머니가 보고 싶으면 마찬가지야 어머니 일상을 다 가져다가 비춰줘 봐 어머니에서 마고할미까지 살아 돌아오실 걸 거 봐 시간이 바로 우리 앞에서 나오잖아 시간이라는 거 흐름이 아니라 사물 속에 숨는 거 네가 가진, 본, 경험한 모든 것에 박혀 있어 꺼낼 수 있는 길은 바로 너뿐이야, 네 인생이잖니 시간이 자..

시 글 2023.12.27

길 없는 길

산책을 하다가 침을 맞았어요 따끔할 거예요 자국이 자꾸 흐렸다 그럴 땐 도서관을 들락였다 핸드폰 속에 꽂아 들고 다니기도 했다 누구는 빗물에 쓸려가는 낙엽에 가 보라 했고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가 돼라 했다 세상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는 복사판이라서 정착지를 얻지 못했다 정말 침을 맞았다 걸을 수가 있었다 바늘이 시를 찔렀다 그는 말했다 길은 당신이 가지고 있어요 도움말은 비슷비슷했고 맞는 말일수록 애매했다 차라리 '죽어 그러면 살 거야'를 듣고 싶었다 셧터를 누르세요 이렇게 공중을 날으는 바람이 소리로 보일 때까지 외침하나 잡고 걸어가고 있다

시 글 2023.12.08

대지라는 어머니

당신을 보고 있습니다 바람이 어떻게 살갑게 살랑거렸는지 햇빛이 어떻게 잎으로 눈이 되게 해 주었는지 어떻게 땅이 당신을 세워 주었는지 지금 왜 춥다 말하지 않는지 가을을 마름으로 매듭하고 겨울을 대나무처럼 꼿꼿히 견디어 봄을 어디에 피울 지 준비하고 있는지 잎이 땅에 수 놓은 숨결과 눈오면 마중할 어깨 동무를 어느 촉촉한 봄의 날에 순명으로 돌아갈 대지에 엎드리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ㆍㆍ 또 내제된 봄을

시 글 2023.12.05

대지의 언어

당신은 참 잘 살아오셨더군요 땅에서 자라 퍽이나 먼 인연 같지만 나를 화폐와 바꿀 때부터 당신을 싱싱하게 보았어요 양픈에 넣고 깨 벗겨 하얗게 목욕시킬 때 태양을 향해 자란 엽록체 팔을 자를 때에도 생명이 교환되어 가는 과정과 가족 미각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지금을 말리려 맹 추위에 매달아 놓았어요 깔끔한 기도하는 품성을 보았지요 나는 잘 견딜 거예요 가지런한 당신의 다음 손을 기다리고 있겠어요 서릿발이 되었다 녹았다 봄이 지나면 야들해지고 작년 V자 편대 가을바람과 비, 햇빛과 땅의 습을 따끈한 국물로 뜰 수 있도록 된장을 풀 때 휘저으면 대지에서 받은 향을 당신께 선물할 수 있어서 고맙다는 말이라는 걸 떠올려 주세요 감사해요

시 글 2023.11.29

동백꽃

말을 하고 싶구나, 지금도 구석진 자리에서 몸에 물기가 돌고 덜 바래졌을 땐 뜨끈한 인절미도 품어내곤 했었는데 전기 들어오고 방앗간 돌리더니 치마폭 새색시도 어매 할머니도 눈 여김 한 번 주지 않더구나 가끔은 친정온 큰딸이 애환도 끌고 오고 손주 이쁜 짓도 귀에 걸어 그네도 태워주더니 세월 커가면서 시댁이 우리 집이라고 곡간 열쇠까지 보여 줬잖냐 기특도 하고 서운키도 했단다 어매가, 딸 하나 잃어버렸다고 나도 이상한 세상 만나고서부터 살도 빠지고 떡메 쳐 주던 삼돌이도 장가가 버렸고 입 주둥이만 벌이고 있으면 뭐 하냐 쌀 한 톨 먹여 주는 이 없으니 바짝 말라 옆구리마저 터지고 말았지 근데 세상 알 수 없어야 어느 날 나를 비싼 가격으로 사가겠다고 귀한 집에 얼굴 성형까지 시켜서 모시고 살겠다고 재수 맞..

시 글 2023.10.29

누가 키웠을까

허리를 잘라 순을 꽂으면 숲이 되는 골은 한 여름이 바쁘다 고구마 줄기 여린 밑을 어린 손이 타기도 하는 오후 방학 이어서일까 계절도 아직 비리다 지진을 감지한 둑은 해산을 준비하고 아이들 갈무리에 가을이 노곤하다 군 고구마가 맛있는 것은 아이는 내 아이인데 뻐꾸기 집에서 키워내서일까 햇빛을 녹여 보내 준 탯줄을 자를 때이다 꼭지가 그리운 너는, 세상에 없었던 너를 태어나 살게 한 고마움 때문 올 추위 구워내 줄, 가마 속에 들어갈 고구마가 미리 발갛게 익고 있다 줄기 하나 심었는데

시 글 2023.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