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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호흡이

여기 한 호흡 있었네 진달래 동산에서 쉬었던 숨 거친 들판에서 모았던 숨 커렁커렁한 자동차 목구멍을 토하던 숨 숨이 있었네 바다를 칼로 가르고 하늘을 톱으로 쓸어낸 네모난 집을 살기 위한 숨이 있었네 광야는 강을 건넜고 에덴은 도망을 갔네 가벼운 짐짝 하나 되지 않으려 세상을 다 들이킨 몸무게 비워내는 마지막 내쉰 숨 두려우셨을까 아까우셨을까 황야를 내 지르던 기압 몰래 숨에 넘겨 주고 색 하나 빛 한톨 남기지 않는 우주가 조용히 이곳에 모였네 당신을 신으로 모시러 몸이 없다는 신을 해와 달 별들이 모두 옷을 벗어 던지고 새 별 맞으러 왔네 남은 자식 둘 거리가 너무 먼 두 손 모은 뜻 별처럼 멀어 한 숨이 떨었던 그 강을 헤아리기나 할까 바람이 일고 불이 살라지고 영혼이 저 골목 사이를 지나고 있네 여..

시 글 2022.06.30

양철지붕

어릴 적 동산 아래 양철지붕 예배당 불붙듯 뜨거운 살갗, 한 여름 비가 오면 세숫대야를 놓았다 붉은 눈물이 또옥똑 떨어지는 곳에 갈참나무 큰 이파리 키가 높은 상수리나무 낮게 기어 다니는 칡덩굴 유치각 유치각 유치각 매미가 첫여름 터트린 느티나무 봄 먼저 알렸던 버드나무, 바튼 기침들 밑에서 자란 어린 풀잎에 파란 눈물이 토도독 토도독 푸른 구멍 난 양철지붕을 보았다 소나기가 지나가면 더 크게 투두둑 투두둑 동그라미 호수 옆 나라 기도 먼저 들으셨음일까 이제야 찾아오신 귀한 손님 양철지붕 꿇은 무릎 마른 쥐가 낱낱히 풀린다

시 글 2022.06.29

물구나무

늘 가는 길 가는 시간에 받침대로 세워진 나무가 걸어요 마주쳐요 기다려 줘요 멈춰서 지나가길 손으로 걷는 다리가 있어요 그는 물구나무를 서요 발로 우주를 그리더라고요 끝내 별을 땄데요 글씨가 비뚤비뚤해요 나 말이에요 지팡이랑 전동카가 없어선 가요 눈도 다리가 멀쩡한데도요 어둠 세월 지나가긴 아직 멀었나 봅니다 그분들만큼 가득 찬 생을 본 적 없어요 늘 가는 대낮인데 늘 가는 길인데

시 글 2022.06.26

흔들릴 때가 좋아요

혼자서 잠수를 탔어요 큰 배는 선장 맘대로 큰 대자 놀음 바다는 흔들리는 미역을 좋아해요 뿌리가 있잖아요 현관문이 환히 열리네요 주변 나뭇잎에 생기가 돌아요 신발은 언제나 깊숙한 곳에 두지요 아내라는 이름 붙은 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더 멋진 이름 부탁드릴게요 연락 주세요 또 문이 열립니다 주변을 살피네요 바닷물이 밀려오네요 늘 그녀의 발은 오른쪽에 놔두고 오죠 장녀가 가끔은 무겁다고 해요 모신다고 하니 활동 사진인지 상영 중인지 구별이 안 가요 마지막 문이 열립니다 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옵니다 소리도 빛도 없어요 살금살금은 호화로운 표현이에요 모시옷 숨을 쉬나 봅니다 두째는 속으로 용감한가 봅니다 선장은 혼자 누굴 보고 흔들릴 때가 좋았었어요 갈대처럼 뿌리根가 튼튼했거든요 오늘은 흔들리다가 잠수만..

시 글 2022.06.26

오후의 바람들

굽은 길을 길게 도는 공원 오후의 바람들이 도시락에 세상살이 담고 와서 뚜껑처럼 가볍게 잔디 위로 비워 내고 심심한 바람은 호수의 수평을 잘게 쪼개 물 비늘로 춤을 추자 합니다 갈대는 왜 속이 비어 있는지 호수 물을 말아올려 가지 끝 잠자리 마른 목을 축이는데 혼자 동굴을 짓고 사는 중년 하나 이곳저곳 전화로 빈 허파 속을 메꾸려 '빨리 와' 재촉하는 입이 마르는지 오후를 계속 들이킨다 제법 느리게 뿌리는 빛살 나무 가지가지로 모자이크 한 하늘 한쪽에 숨은 수비둘기 한 마리 저녁 식사를 알리는 구구 구국 구구 구국 매달린 공원의 피아노는 종일 음악회 피로로 배고픈 허리를 가늘게 지압해 가며 서쪽 하늘 능선을 등진 나뭇잎들이 서서히 그림자 긴 어둠을 배꼽 아래로 내려 앉히기 시작합니다 집으로 가고 싶어 지..

시 글 2022.06.22

안개 시집

안개 시집 여자를 끌고 가는 강아지 손목 줄을 매어달고 꼴랑꼴랑 앞서 간다 소변보고 싶으면 전봇대가 재미있어한다 꼬리로 오후를 지우며 저녁으로 가고 목줄 같은 시달림에 그녀는 하루가 배 고프다 까치 주둥이를 잔디밭이 사정없이 쪼아댄다 저물어 가는 해가 찢기고 창자가 터지도록 아픈 쪽은 주둥이가 있다 느티나무가 공원 의자에 한 숨을 몰아 그림자처럼 눕는다 아픈 등과 알밴 종아리를 분리한다 침대가 서서히 바뀐다 깨알 같은 눈들이 나를 보고 책장을 넘길 때마다 우르르 정열을 하고 나를 사열한다 붓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제목을 써 놓고 주석을 살핀다 3 년은 지나야 짖는다는 개의 혀를 볼 수 있으려나 숲이 째재짹짹 소리 영역을 둥글게 펴면 바람을 나르던 새소리가 가지로 앉는 공원 땅이 석양을 낮게 내놓을 때 안..

시 글 2022.06.15

가끔은 갈지 자가 필요해요

ㅡㅡㅡ 달콤한 초콜릿은 입이 좋아해요 위와 다른 기관들은 싫어해요 쌉쓸한 녹차는 입은 마땅치 않아해요 위와 다른 기관은 싫어하지 않아 해요 기다려요 좋아하고 싫어하는 존재가 입이었나요 나는 아니었나요 그렇지 않아요 나는 초콜릿을 좋아하고 녹차는 별로이거든요 나와 입은 같은 건가요 그건 아니에요 분명 나는 건강하기를 원하거든요 나는 누구인가요 입도 다른 기관도 아니면 누구인가요 정신이라고요 그것도 말이 안 돼요 정신도 갈지 자를 쓰거든요 몸도 아니요 정신도 아니라면 지금 나는 뭔가요 생각해 보셨어요 갈지 자 걸음을 쓰고 길을 만들면서 장난 같은 놀이도 하는 속 껍질을 슬쩍 드러 내주고 가는 그러면서도 하루 두 번 고문 같은 긴 숨으로 깊은 곳에 이르려는 처절할 때 바다로 가서 섬을 만나는 저 갈지 자 시어..

시 글 2022.05.25

화석은 죽은 후에

ㅡㅡㅡ 화석은 죽은 후에/곽우천 화석을 캐러 다녀왔습니다 오늘 부드러운 살을 좋아한다는 전설을 믿고서 수천만 년 전 바람과 소리와 빛과 색을 보고 싶었습니다 의사가 그러네요 화석은 커녕 그림자 근처도 보이질 않네요 왜 서운 하세요 노후에 한 건해서 폐광 부자가 되려 했는데...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제 복은 서로 처다 보는 두 얼굴... 피익 웃고 나온 오후입니다

시 글 2022.05.23

어떤 어깨

ㅡㅡㅡ 메타세쿼이아는 수평을 좋아해요 수평이 무기이거든요 하늘이 비를 줄줄 내리면 빨랫줄은 판초우의를 걸쳐요 뙤약볕 무게를 지고선 하루를 버티지요 여름 푸르는 날 평형대에 빨래를 걸면 하늘로 올랐지요 프로펠러 양 날개가 구름을 마셨고요 왼쪽과 오른쪽 활시위가 평평해지면 줄잡이 커튼을 내리고선 호흡을 숨겨 갑니다 외로운 학이 날아올 땐 으드드득 결리는 물을 삼켜요 아마 마지막 중력이었을까 울컥할 때 호수가 떨고 있어요 호수 한 쪽이 수평을 잃어요 어깨가 술 한 잔 하고 싶데요

시 글 2022.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