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글 321

만추의 밤

ㅡㅡㅡ 그들은 비를 맞고 걷고 있다 보고 있다 불빛과 빗방울 물든 나뭇잎 나란히 쓰는 우산 끼운 팔 서로 지금을 좋아하고 있다 사랑하고 있다 아름답다 한다 그들은 걷고 있다 과거를 걷고 있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를 버리기에 아름답다 버림은 지나감이요 지나감은 과거로 감이다 그들은 걷는다 과거에서 나와서 지금을 걷는다 분명 저들은 과거들이다 그러나 저 아름다움은 지금 존재한다 바로 지나가는 과거 길을 걷는다 지금은 장날처럼 없다 바로 과거이다 더 중요한 것은 과거는 부담이 없이 살아나오는 즐거움이다 아름다움이다 지금이란 '공' 이다 과거가 변하여 지금이 되어 온다 지금의 것은 과거에 있었던 존재의 변천이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한다 정지는 올 스탑이다 죽음이다 정지는 이 세상에 존재..

시 글 2021.11.25

대접

ㅡㅡㅡ 전화를 받는다 들려오는 목소리가 무겁다 내일 저녁은 강남 SS 병원으로 가기로 약속 시간은 이미 채워진다 입구에는 천정에 닿을 만큼 훈장이 여럿 달린 장정 같은 화환이 복도 양편에 주욱 서 있다 맨 앞쪽 두세 개 화환을 읽는다 ~회장,~대표이사.. 상주와 가벼운 목례만 하도록 안내 팀은 사전 공지를 한다 당신은 한복을 곱게 입고 과거의 시간을 삭제하고 사각의 방 안에 걸려 있다 과거의 미래인 현재 당신은, 용인 모란 공원묘지라고 써 있어야 한다 붉으스럼하고 윤기 나고 기품 있어 보이는 피부색이 얼굴에 살아나 보인다 지금 화장기 없는 당신, 꽃 한 송이 보이지 않는 표식도 없는 들판에 홀로 구르고 있다 당신의 목소리가 들려요 '고마워요 입 입을 주셔서' 비가 내린다 긴 우산을 들고 당신에게로 가고 ..

시 글 2021.11.23

가을을 꼬리에 달고

ㅡㅡㅡ 바람이 가을을 하나하나 세며가는 산동네는 다람쥐의 잔치상이다 떡 벌어진 하마 입에서 내놓은 알밤이며 스무 살 챙 없는 꼭지 달린 모자를 쓴 매끈한 몸매 도토리 하늘로 튀어 오른 참나무 가지엔 미처 빠지지 않고 까치밥처럼 달린 몇 개의 알들 심심하면 떡갈나무 가지를 흔들어 흔들리는 나뭇잎이 바람을 내어 가을 악보를 풀어내게 한다 자잘 대는 개울물에 목을 축이고서는 닮았다는 쥐의 목청으로 찌지찍 골짜기를 찔러 존재를 과시한다 동안거에 들기 전 다듬어야 할 단백질은 갈잎 속에 한 무덤 바짝 마른 바위 사이에 광주리채 말려 놓았다 나머지는 양지바른 땅 스무 곳에 내년 봄 싹 틔워 잘 자랄 다섯과 싹도 못 내고 썩어버릴 열 자리 꺾일 다섯 뭐니 해도 사는 오늘이 좋다고 양볼에다 도토리 뽈록 품고 하나씩 꺼..

시 글 2021.11.08

능사리에 가면

ㅡㅡㅡ 과거를 헤집고 사는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무덤은 언제 무엇으로 살았는지 알리지 않음이 알림보다 길어서였을까 비문 하나 없는 묘 어릴적 말랑한 밀랍을 먹고 자랐고 거푸집엔 뜨거운 화로가 있었다는 것 게다가 젊은 시절 아말감빛 화장을 했다는것도 알아 내었다 또 하나는 과거의 늙은 빛과 색에서 급박했던 말굽과 창에 찔림에도 끔쩍하지 않는 부처로 살아 극락으로 가는 연꽃을 피워냈다는 걸 옛 땅을 파고 산다 함은 문화도 과학도 역사도 죽음에 이르기 전 피워낸 꽃들 천 년을 살아왔다는 비밀은 시간이 시간을 거꾸로 먹고 산다는 것 능사리에 가면 아직도 설레이는 염원의 향불 하나 타고 있다 ♡사진 : 백제금동대향로

시 글 2021.11.02

기억

ㅡㅡㅡ 기억을 더듬어 밤을 새고 있는 새 한 마리 배고픔은 스스로 석고상을 제작하고 제사상 차려준 강에게 감사한지 오래 번득이는 은어 한 마리 있어 집중하니 구름에 걸린 달님의 허리 그 뒤를 스쳐간 언어는 무엇일까 작년 이때쯤 목에 걸린 붕어 한마리 생각나 그냥 목을 축여 본다 올해는 한강에도 코로나가 걸렸나 작은 고기 떼는 간데 없고 123층 사는 머리까만 물고기들만 울긋불긋 배고픈 가을 강가를 훝어 댄다 사냥은 흔들림 없는 침묵이다 ♡ 밤 7:15분 경 주린 배를 안고 석고상처럼 서서 이 밤 찬거리를 기다리는 새 며칠 후 그 자리 그 시간 대에 서 있는 그

시 글 2021.10.14

허수아비

ㅡㅡㅡ 허수아비에게는 사람 냄새묻은 죽은 휴대폰이 목에 걸려 있다 가을의 언덕배기는 소솔한 가슴을 바람으로 내어 몬다 하늘 끝으로 달리던 구름이 석양녁 어디쯤에 닻을 내릴까 망설이고 서성이는 청바람은 숨을 고르고 쉬어갈 밤의 숲을 찾고 있다 젊음을 밀어넣어 화폐가 되어 나오던 신화는 누군가의 부름으로 시작되었나? 불혹을 훌 넘어선 녀식들은 헤어짐을 버렸고 목소리는 은근슬쩍 제 힘을 재어본다 일상을 묶은 밧줄은 쇠고랑을 떠나질 않았고 노년에 얻은 아픔을 신의 언어 마냥 예의를 갗추는 의사 허수아비는 여직껏 키워온 아비의 무게를 기꺼이 내려 놓는다 직장을 끌었던 어께, 자식을 키우는 입, 몸을 꿰매는 바늘의 떨림 하나도 하늘의 틈없는 씨날로 엮어 내심이여 아침을 떠난 길이 강을 만나 흐르며 저녁 붉은 노을 ..

시 글 2021.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