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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권 타는 날

이발소가 나를 찾는다 옆머리 더울 때는 바짝 올려 깍아 주겠다 한다 스포츠머리는 아니지만 올만에 젊은 오빠가 되었다 바나나 주스 두 컵이 마중 나왔다 딸하고 손자를 만나려면 달콤한 남쪽이야기가 필요하다고 길고 둥근 즐거운 날 복권 타는 날 메시지가 귀로 눈으로 가슴으로 들어온다 이릴 땐 좋은 소식이다 감각 기관 서너 개를 동시에 울린다는 건 슬픔보다 기쁠 때이다 XX은행 컴퓨터가 전수 조사를 끝낸 후 오늘 오면 이자를 더 주겠다고 제시 한 금리가 작년 3 배인데도 배가 고팠다 간사한 속내 숨기고 기꺼이 챙기고 왔다 나를 찾는 사물들이 더 많아졌으면 한다 살만한 오늘처럼 내일이 되면 또 오늘 남은 시간 이렇게 무작위 하게 끌어다 붙인 문장이 '속없는 녀석'하며 재미있어한다

살며 생각하며 2023.06.22

채우거나 메꾸거나

그만큼 한 줄기의 물 폭포의 이음이라도 되는 듯 끊임없이 내놓고 있다 나무의 뿌리 사이 돌멩이 비켜선 사이를 지나고 풀뿌리에 머금을 한 방울 물 땅 속 습기를 뽑아내 가지에 모으고 줄기로 모아 수도관 같은 약수로 내리는 땅 속 물줄기를 헤아려 본다 나무의자를 찾은 목 축이러 나온 모기 대 여섯 마리가 덤벼든다 날렵하게 두 마리를 잡아 내었더니 방금 약수 떠낸 빈자리를 메우듯 두 마리 어디서 왔는지 도로 대 여섯 마리로 불어났다 누구에게나 공간이란 생명의 영역인가 보다 이놈들은 빨간 자기 뱃속까지 채우러 온 녀석들이다 물은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 채우는 걸 보면 입으로 내놓는 트림과 항문을 뚫고 나온 방귀는 우주를 채우는 방식이 다르다 약수터에도 빈 곳이 있어 까치 까마귀 알아차리고 울음 토해 숲 빈 곳을 ..

살며 생각하며 2023.06.18

사라진 것들

어느 날 큰 불덩이가 태양계를 모두 삼켰다 그 안의 생명체나 무생명체는 모두 불에 녹아 없어졌다 점보다 작은 빈 공간 하나 우주에 생겼다 원하던 이데아는 어디로 갔을까 땅을 파던 손발은 어디로 갔을까 신은 어둠이 사라진 것처럼 사라졌다 이 우주는 전혀 관심 없었고 그러기에 어떤 미동도 없었다 인간과 자연과 신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무슨 의미들이 살고 있었던 걸까 우주는 무슨 의미들로 이루어진 걸까 사라질 것들인가

시 글 2023.06.14

경계를 안테나 하고 있다

하루치 어둠을 몰고 온 끄트머리쯤 초병으로 섰던 현관문 딩동댕딩동댕 되돌아온 오늘은 히스테리 혼방으로 들어가고 끌린 발자국 소리에 하루를 풀어 해석한다 오늘은 어땠습니까 찬바람 쌩 물고 들어가는 늦 침대 하나 벌써 일주일째다 그날의 마침표에는 묻혀들인 바깥 색깔을 감별하고 발바닥 미끌린 중력을 재어보는 일 색깔과 무게가 주는 분별은 분별을 낳고 분별에 지는 밤 침대는 건망증 수면 중이다 찟뿟한 아침과 서류 젖은 저녁나절 사이 풍진계의 수직 파장과 자전의 수평 기록들 계급의 기색을 살폈을 속 알아 채기/ 그림자 지지 않으려는 들고 나온 커피나뭇잎들의 수다/ 흑그라스 뒤 변색된 가면/ 을 감식하기 바쁜 안테나 하루가 던지는 질문, 왜 살지요 양파껍질 일과들 기록이 되고 수축되는 하루 가장 먼 인사 안녕히 주..

카테고리 없음 2023.06.01

한 이불 속 들어갈 때

한 이불 속 들어갈 때 그와 나누는 대화를 독백이라 합니다 둘이 속삭이려면 벽에 기댈 때 높이가 맞습니다 어떤 배경 이야기든, 예를 들면 아름다움 고통 지식 종교 등 그는 변색하지 않는 평등심의 소유자로 나옵니다 가끔 자전거를 타면 특별할 수 있어요 따라다니며 바퀴를 돌립니다 나는 무동력이 되는 경지를 맛보게 되지요 혹 배를 탄다면 검은 고래 한 마리 배 아래 희뜩번뜩 찰싹 붙습니다 늘고 줄임에 자유로운 길이 나와 같은 키 재기 들어도 입이 없고 보아도 전함이 없는, 먹물 찍어 산수 그려 내는 동양화가랄까 발뒤꿈 물고 사는 천성은 꼬리달린 신의 신봉자 여서일까 죽음이 영원한 거라면 순간 든 낮잠의 그림자 같이 걷고 먹고 한 이불속 들어갈 때 고스란히 한 몸의 이야기가 됩니다.

시 글 2023.05.30

새 아침을 주문하다

목성에서 아침을 일어난다 부피가 크면 일어서기 힘들어서 물속에 넣은 소금이 된 가죽옷을 입고 일어난다 억지 밥을 소리라도 맛있어지라고 꼬꼬 꼭 씹어 삼켜 본다 목구멍이 헛발질을 케캐 캑하고 하루를 견뎌 낸 짠 땀이 눈 안에 뻐걱뻐걱 레슬링 한다 오늘을 둘러보니 어제 만치 벗어날 길은 다닐 곳에 숨겨져 있다 때마침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이론가 시클롭스키를 만난다 일상을 벗어난다는 거 새롭게 하기일 뿐이다 잠깐의 외출은 돌아오면 목소리 잠기듯 들어가고 일상은 일상이 되고 있다 목구멍이 바이어린을 켜고 뻑뻑한 눈이 함박눈을 맞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목들 형식을 일 년에 한 번은 벗어나 현실과 맞닥뜨리는 다른 지혜를 가지고 있었네 목성을 탈출하기란 이목구비를 어디에 두고 부릴 것이냐에 집중을 해 보려 하는 새 ..

시 글 2023.05.26

밤을 한 입에 삼키는 법

*밤을 한 입에 삼키는 법 바람이 불렀을 때 하품을 하고 있던 어둠이 밤을 한 입으로 삼키자 밤은 곧 어둠이 되었다 바람에 강한 어둠 세상엔 너에게 꼼짝도 않는 게 있지 했다 바람의 묘수를 알기나 했을지 어둠을 품어 낸 거야 밤이 맞도록 샛별의 눈이 흐려지는 시간 아이는 살았고 산고 끝 어미는 사라져 갔다 어둠이 출산을 한 거야 맑고 밝은, 바람이 모처럼 살랑거리는 아침을

시 글 2023.05.19

Endless 전쟁

*Endless 전쟁 다섯 살 어느 날 이사 갔던, 지금 내 고향 토방이 나지막한 늙은 호박 같던 집 재혁이가 싸움을 걸어왔다 터를 중요시하는 고양이 동네 한 바퀴 돌고 오다 영역 침범 범이라도 된 나 염탐꾼 검색의 찢어진 눈 학교에서 만나면 기를 꺾으려는 보험용이었을까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폼을 잡았다 우리 땅 한 발자국도 딛지 못하게 할 것처럼 망치로 못질한 발바닥 캥거루 달음질로 왔다 역사가 긴 동네일수록 울타리 경계를 넘은 호박은 말뚝이 박혔고 냇물 목간하는 여자아이들 팽나무에 올라 보초를 서는 일들이 행했었지 여름 달빛마저 잠을 자고 있을 때에도 팔레스틴은 이스라엘 호미 끝 같은 창을 피해 땅굴을 파고 들어가고 있었다 그건 풀들의 Endless 전쟁이었다

시 글 2023.04.30

골절된 가지에서

*골절된 가지가 길이 되어 석양 끝에 선 한 소나무를 만났습니다 피곤한 하늘보다 어둠을 먼저 가져와 눈이 새까맣다 낮 동안 갈증을 꺼내 몸을 호수 쪽으로 기울고 가지를 손 끝처럼 내어 밀고 있다 걸을 수 없는 몸은 하늘에 길을 낸다던가 아예 골절된 가지가 길이 되어 허공을 걷고 산다 욱어졌던 품 바람에 숭숭 내어 주고 이 밤을 침묵으로 서 있는 나무 아버지 굽어진 어깨 가지에서 뵈옵니다

카테고리 없음 2023.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