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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허공같습니다

곽 우천 오늘 날씨가 좋으니 매미 소리가 되었습니다 가다 보니 개망초꽃이 됩니다 풀이되었고 나무가 되었고 빛이 되었고 호수가 되었습니다 여인이 지나가다 던진 향수가 됩니다 달콤한 사탕입니다 걸어가는 걸음이 되었고 차례대로 일어서니 그게 내가 됩니다 경계감이 없어지고 용서라는 용서도 없는 용서 세상 일이 아무것도 아닌 시간도 느껴지지 않는 오늘은 대상을 얻음이 허공 같습니다, 아무 물도 들지 않는

카테고리 없음 2023.08.13

가을이 서다

풀잎, 눈치빠른 입추를 어찌 읽었나 귀뚜라미 소리 바구니 들고 땔렁이는 새벽 두부장수 땅 속에서 계절을 어이 돌리는지 여름에 가을을 파는 촉수 몸 속에 들어가면 나도 그리 날 더 잘 알까 울밑 봉선화 짝꿍 땅강아지 아파트 벽 사이 가을 걸어 놓고 땅 멍을 틀어대면 메아리 계곡은 더 깊어가고 늘려가던 여름 접고 멈춤으로 바뀐 홀몬 허리 쭉 편 숨 가르며 가지에 맺은 가실에 충실 하자네

시 글 2023.08.08

자유로운 멈춤

자유로운 멈춤 곽 우천 지금 난 나의 시체를 운반하는 걸 본다 집에서 병원으로 병원에서 불바다로 시공간을 잊은 공간 부모 형제의 개념 자체가 없는 슬픔도 기쁨도 없는 무의미와 의미가 무의미한 곳 내가 어디로 놓이고 가고 있는지 볼 뿐이다 나를 이렇게 보기는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다 그냥 미라인 상태이다 잠이 아닌 멈춤으로 과거도 현재도 미래의 시간이 내 몸에 가두어져 있다 불의 시간이 지나도 어떤 형태의 변화는 없다 미라를 만드는 이유가 시간의 가둠이었는가 영원을 만드는 기술 무감각 나가고 들어 옴이 없는 보존 쇳덩이가 붉게 달구어졌다가 식은 지금부터 난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다 어디에 있음은 무의미하다 어둠이 하나인 것처럼 이곳저곳은 없다 우주의 시작이 여기이고 끝이 여기이다 여기에 모두가 여기에 있다 그..

카테고리 없음 2023.08.03

그냥 사는 거라고요

말 너무 쉽네요 공부도 쉽고 노래도 쉽고 지나기가 쉽고 좀 어렵네요 사람 알아가기가 어렵고 일한 대가 받기가 어렵고 먹여 살리기가 어렵고 나를 찾기가 어렵고 너무 어렵네요 남을 이해하고 나를 낮추고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 다 내 잘못이라는 것 세상에 더 어려운 게 있을까요 난 있어 보입니다 한 우주를 품고 기르고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 입이 아니라는 것 손이요 발이요 머리끝이요 피였고 애간장이었고 참음이었고 견딤이었고 그래 그래였고 오냐오냐였고 눈물 한 방울이었다는 것 다 품으신 한 줌 어머니

시 글 2023.07.19

오란비 걷히던 날

언젠가 며느리 불러 낸 뒷동산 바위의 기약이 있었지 보리 베어낸 자리에 모를 내는 이모작 궁핍 시절은 발등에 오줌 싼다는 숨 가쁜 마을이었다 삽 한 자루 들로 나가 마른땅 한 삽 두 삽 떠 펼친 논 마지기 중천의 해는 한해를 그리 저물어갔었다 배고픔은 해도 잊을 수 있었던 걸까 올해는 몰라도 내년에는 부쳐 먹을 수 있어야 그 당겨진 혁띠를 헤아렸던 아이 아버지 기일 15 년째 해 아내로 등기해 준 마지기 논 못내 매매계약서에 도장 올린 꿀꿀함 짓던 땅 마지막, 붉은 인주가 아버지 되어 마을을 떠납니다 무릎을 친 감사헌금 언어가 서로를 위로 할 때 오란비 걷힌 후 가슴털이 그리 뽀송하였던 뒷동산 뉘인 바위 발걸음 우리를 알아보시던 날

시 글 2023.07.15

발바닥 가운데가 왜 오목한 지 (한강 생태공원 한 바퀴)

발바닥 가운데가 왜 오목한 지 (한강 생태공원 한 바퀴) 비 그친 뒤 땅은 빨랫줄에 방금 연 옷처럼 여름을 물고 땅의 근육과 핏줄을 끌어 쥐고 있다 바닥을 딛고 선 맨발 하얀 개망초 열 송이 발끝에 피워내고 밟히지 않으려면 길을 내 주거라 숲은 하늘 닫은 오솔길에 구불구불 골목길 터 주었네 가끔은 물웅덩이 세족탕을 파 놓고 조심을 파종한다 심심했던 지 길 동생 밴 어머니 배처럼 빙 돌아서 나오게 하고 여섯 달만큼 길을 늘여놨다 까치밥 된다는 찔레꽃 씨앗 아직은 푸른, 겨울 색을 고르는 중 작년에 보았던 고라니 오줌발 옆 노루오줌꽃이 대신 피어 하늘에 선물한다 살빛 브로치를 오솔길 가로지르는 작은 뱁새들 한 방향 가는 길에도 여러 길이 있다고 이쪽저쪽 파고드는 쪽숲 어둠은 소리를 집어먹고 그림자를 훔쳐먹고..

시 글 2023.07.11

느티나무 교실

알림 선생님이 저 새는 무슨 새에요 묻습니다 으응 두루미 아니에요 학생이 답합니다 그래요 두루미 성내천 물이 발목을 잡고 긴 고개입에 물고기를 던져주어 사는 두루미 이야기가 나온다 생각 선생님은 사랑 마크가 뚫린 플라스틱 책받침을 가지고 다니는 학생들에게 모과나무껍질에 책받침을 대어 주고 뭐 같아요라고 묻는다 얼룩송아지 같아요 기린 같아요 그럼은요 얼룩송아지 기린 좋아요 질경이는 질경이 밤송이는 밤송이 끝에 찔리는 가시가 달린 네 잎 클로버는 행운이라는 두 글자가 추가된 행운의 네 잎 클로버로 명명되었다 어둠을 들이쉬기 시작할 때 숲은 손전등을 켠다 나방들 숲 사이에서 별이 되고 달이 되고 반딧불이가 되고 알림 선생님은 알림 선생님이 되고 생각 선생님은 꿈 선생님이 된 밤 사이 우주가 떠다닌 푸른 숲꿈이..

시 글 2023.07.06

한강에 발 담구고

둘레길인지 나들길인지 길을 따라가다 보면 알몸 한강이 철철이다 이 강물 마신 지 50여 년 더위를 마시는 물길, 삼키는 숲길은 이십 리 길 맨발의 청춘 필름 한 통 길이 여섯 친구 불러 낸 통화는 둥근 지붕에 간 친구 이별 이야기 그림자를 출장 보내고 나니 섭섭함은 외출을 하고 마냥 좋아하는 발가락 언젠가 제주 출장길 따라나선 옆지기 한라산 오르던 강아지 발보다 날렵하다 평생 가족 지켜 주던 그녀도 그림자 속도가 느려지고 가끔 어둠 파는 이야기를 하곤 동굴 안으로 들어간다 발바닥 열기는 내일까지 숨통 열 개가 부채질할 거란다 한강에 담근 발이 숭어처럼 뛸 때 태양을 토해 낸 저녁 보트 하나 물길을 접는다

카테고리 없음 2023.06.28

바꿔치기 한나절

걸망 매고 판 벌린 한나절로 가는 길 동네 젊은 친구 둘 담배 한 대 물고서 야 사는 것이 친구를 만나는 것인 것 같아 그럼 나는 뭐지 담배 맛만큼 쓰다가도 모를 안정감에 속고 있다는 듯이 비벼 끄고 오후에 비는 쏟아 붓겠단다 먹고 마셔야 산다는 한의학 박사 배 넷 바나나 3 단 당근 두 봉지 브로콜리 두 덩이 비트 한 바구니를 만나러 나절 시장은 살리려는 것들을 바꿔 주고 있다 구름은 살려 비로 바꿔치기 하고 나는 살리려 주스를 갈고 살아 있음을 글로 바꾸고 있구나 바꿔치기 한 나절이다

시 글 2023.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