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글 321

가끔은 갈지 자가 필요해요

ㅡㅡㅡ 달콤한 초콜릿은 입이 좋아해요 위와 다른 기관들은 싫어해요 쌉쓸한 녹차는 입은 마땅치 않아해요 위와 다른 기관은 싫어하지 않아 해요 기다려요 좋아하고 싫어하는 존재가 입이었나요 나는 아니었나요 그렇지 않아요 나는 초콜릿을 좋아하고 녹차는 별로이거든요 나와 입은 같은 건가요 그건 아니에요 분명 나는 건강하기를 원하거든요 나는 누구인가요 입도 다른 기관도 아니면 누구인가요 정신이라고요 그것도 말이 안 돼요 정신도 갈지 자를 쓰거든요 몸도 아니요 정신도 아니라면 지금 나는 뭔가요 생각해 보셨어요 갈지 자 걸음을 쓰고 길을 만들면서 장난 같은 놀이도 하는 속 껍질을 슬쩍 드러 내주고 가는 그러면서도 하루 두 번 고문 같은 긴 숨으로 깊은 곳에 이르려는 처절할 때 바다로 가서 섬을 만나는 저 갈지 자 시어..

시 글 2022.05.25

화석은 죽은 후에

ㅡㅡㅡ 화석은 죽은 후에/곽우천 화석을 캐러 다녀왔습니다 오늘 부드러운 살을 좋아한다는 전설을 믿고서 수천만 년 전 바람과 소리와 빛과 색을 보고 싶었습니다 의사가 그러네요 화석은 커녕 그림자 근처도 보이질 않네요 왜 서운 하세요 노후에 한 건해서 폐광 부자가 되려 했는데...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제 복은 서로 처다 보는 두 얼굴... 피익 웃고 나온 오후입니다

시 글 2022.05.23

어떤 어깨

ㅡㅡㅡ 메타세쿼이아는 수평을 좋아해요 수평이 무기이거든요 하늘이 비를 줄줄 내리면 빨랫줄은 판초우의를 걸쳐요 뙤약볕 무게를 지고선 하루를 버티지요 여름 푸르는 날 평형대에 빨래를 걸면 하늘로 올랐지요 프로펠러 양 날개가 구름을 마셨고요 왼쪽과 오른쪽 활시위가 평평해지면 줄잡이 커튼을 내리고선 호흡을 숨겨 갑니다 외로운 학이 날아올 땐 으드드득 결리는 물을 삼켜요 아마 마지막 중력이었을까 울컥할 때 호수가 떨고 있어요 호수 한 쪽이 수평을 잃어요 어깨가 술 한 잔 하고 싶데요

시 글 2022.05.20

색은 더 고와졌다

ㅡㅡㅡ 마을을 내려다 보던 달 가지에 걸린 바람 한 점 잡아 놓고선 동자로 세월이 아닌 색과 결을 찾고 있네요 봄 가뭄을 타던 내장에 있는 습들은 바스러진 표피를 지키려 자신을 짜 내고 연장시켜 준다는 생명 가죽만 남긴 금식은 여태껏 바짝 붙인 바닥을 셈하고 있습니다 깨지지 않는 그림자와 달의 뒷면에서 긁어낸 문신 조각 조명이 물어다 준 생인 손 수 천만년 전 지층에 눌린 흔적은 비 폭력 저항처럼 순하고 깊은 간디의 얼굴입니다 날개 세운 돛은 집열판 회로를 꺼내어 바람으로 채우고 색을 입혀 벌판을 핥고 온 시베리아처럼 섬섬하네요 손금을 좀 보는 점술가가 조상을 물어보고 생명선은 거북처럼 길고 질겨 이 생보다 더 긴 느린 걸음이랍니다 오래된 빛은 아주 느렸고 색은 더 고와졌더라 나이 들어 학자들은 다윈의 ..

시 글 2022.05.17

마술없는 세상

가끔은 오르고 싶었어 구름을 구름은 요술은 가지고 있으나 마술이 없는 세상이거든 우산과 양산을 말하는 건데 나는 우산일 때는 비가 오고 양산일 때는 볕이 들지 말이 뒤집어졌나 비가 오면 우산이 되는가 아무튼 그래 색 하고는 관계가 적어 울 엄마는 늘 반대이셨어 딸이 둘이었는데 우산과 양산 장사를 했지 큰 딸은 양산이고 작은 딸은 우산이거든 그럼 맞춰 봐 비가 오면 누굴 생각하겠는지 이제 너도 그 이유를 알았지 그런데 말이야 오늘은 내가 꼭 되고 싶은 게 있거든 말해도 되나 비밀인데 입맛을 돋우잖아 봄나물은 육수가 필요한데 산도 있어야 하고 바다도 있어야 해서 오늘은 산을 선택했어 네가 서 있는 곳 널 닮은 것인데 디포리 다시마와 함께 넣고 끓이면 왕육수가 되지 표고버섯이야 봄 입맛 나게 해 주지 몸조심해..

시 글 2022.05.14

풀꽃 씨

♡♡♡ 너는 누군가가 갔었던 길에서 길을 찾기로 한다 소식도 주지 않고 조용히 맘먹은 대로 어떤 식사를 위해 사전에 맘에 든 식당을 찾지 않았다 제법 맛있고 깔끔한 빛에 고마운 색 하나 입히고 그 갈피를 기억해 두기도 한다 그곳에 가려면 자동차도 비행기도 돛단배도 타도 되지만 그것들은 결국 돌아오는 길이기에 맨발로 걷기로 했지 가고 싶은 곳에는 아무도 찾지 않았을 길이 끝나는 곳이기를 바랐다 길이 끝나는 길은 없었고 절벽엔 밧줄을 타고 빌딩 청소부 아저씨가 있었다 애초에 길은 찾는 게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너는 가는 길이 길이었다는 걸 안 뒤로, 너의 그림자 얼굴 그림 구두를 닦는 일 풀빵을 파는 아주머니 주머니 속에 있었다 주머니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아껴 두다가 너의 말을 꺼내간 녀석도 있었지 말은..

시 글 2022.04.29

오후 다섯 시

♡♡♡ 책 한 권을 들고서 곰바위 넓적다리 좁은 계곡은 물을 품어 새들이 찾고 까마귀 까치 많고요 뱁새 찌르레기 이따금 제주 휘파람새 휘휘휫 날갯짓 소리를 쫒다 잠깐 잠이 들었네요 큰 새들 바람소리는 얼굴을 덮고 이 가지 저 가지 나는데 까마귀는 죽은 시체를 좋아한다네요 확인하러 왔나 비켜가는 낡은 비행기 연통 소리에 깨니 의심 버린 새들 그냥 쉬어가세요 오늘 빌려드린다네요 작년 죽은 가지 잎이 메마른 귀를 긁고 가고 깊은숨 이런 꿀잠은 따뜻이 내어주는 이곳 바위 등만 알지요 계곡 바람이 소동을 하네요 아래서 위로 부는 바람이 이 시간이면 몸통을 틀어요 위에서 아래로 계곡만이 아는 비밀입니다 송화 꽃 향이 퍼질 시간 이것도 비밀입니다 큰 숨 한 번 더 쉬고 6시 돌아갈 아쉬운 시간입니다

시 글 2022.04.26

미래가 현재에게

♡♡ 천아 나 자금 월남이야 파병 나왔어 뭐 파 파병이라고 니 지금....뭐라 했니 말 문이 막혔다 그와 나는 국내에서 알아주는 회사 입사 시험에 동시에 합격해 여유 있는직장생활을 하던 동창이다 성학아 꼭 살아 돌아와야 한다 알았지 다낭 항구의 환영식의 함성과 스피커는 항구를 찢어 놓고 있었다 나도 악을 썼다 느릿한 성격의 그, 그래서 그걸 고치겠다고 해병대에 자원했고 파병 부대로 차출당했던 계기가 되었다 월남과 두 시간 차이의 전화는 2 억년 전 별빛이나 같은 것이었다 나는 인천항으로 직행했다 그가 닿고 있는 바다에 발을 동시에 넣고 싶었다 그의 내장에 내 차가운 발등을 넣어 식혀 주고 싶었다 세차던 파도가 이내 잠잠해졌다 다낭항과 인천항 동시 생중개 방송이 시작되었다 그의 발등이 물속에 보였다 군화를..

시 글 2022.04.25

발걸음

♡♡♡ 시인이 말한다 몇몇이 모여서 가장 선한 말로 우린 배고프지 않니 배 고프진 않아 배고프지 않다고 그래도 고프지 않다고 마련한 무대는 번지지 않았고 번졌다고 생각한다 번지길 희망한다 시집이 배고픈 건지 시인이 배고픈 건지, 시가 어려운 건지 시집이 어려운 건지, 희망을 부풀린 건지 욕망을 부풀린 건지 모임은 끝났다 간단한 빵 하나 식탁에 오른다 채석강 지층이 아름답다 무겁다 메아리가 외롭다 빠져나오려 하니 물이 불어나 나갈 수가 없다 조난 신고에 숙박비를 날렸다 통일호를 찾았다 새마을호도 사라졌단다 KTX에는 먹을 것도 없다 라면 속 국물이 짜다 옛 직장이 말한다 돌아와 발걸음은 맑은 서점 골목이다 내 책, 시집을 사 줘야겠다 ☆김선우 시집 내 따스한 유령들 중 '시인과의 대화'를 읽고

시 글 2022.04.22

허기 한 줌 쥐고서

♡♡♡ 허기 한 줌 쥐고서 파동을 냄새 맡고 찾아가는 거머리처럼 빈 마당을 나선다 강의 페달을 밟는 자전거가 풍경을 앞바퀴에 잔뜩 압축하고 종일 안고 다녀도 채워지지 않는 푸들의 꼬리에 달린 고민들 손을 잡고 다녀도 연결되지 않아 마뜩지 않은 저 두 젊은 영상은 뭘까 유모차는 아기의 배고픔일까 엄마의 산책 시간일까 핸드폰에 박혀버린 눈 운동기구에 매 달린 늙은 삭신들의 마른침 강물을 빨아들인 아파트의 훵한 갈증 오르고 싶은 하늘을 얼마만큼이나 끌어내린 어린아이의 그네 타기 손가락 다섯 개 체온을 기억하는 버려진 아기 장갑 한 짝 젊은 네 쌍의 잔디밭 미팅 눈빛들은 바닥 아래 살짝 짚어 주고 간 어느 어깨 강을 건너면 다시 강을 건너고 또 건너면 건너고 싶다고 강을 하루 네 번을 넘다가 데이트를 마친 밤의..

시 글 2022.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