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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깁기한 몽타주

땅이 하늘이 웅얼거렸다 에덴이 떨렸을 때 아담은 풍선 구멍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뿌리는 끈질긴 촉수로 땅에 붙임성을 파고든다 어디서 생겨났는지 근육질은 향과 열매로 가족을 낯선 고을에 아뢰었다 '나하고 농사짓자'는 밥상 언저리에 아린 토 하나 애먼 숟가락으로 찔림을 당한 아침 상 허허 뒤꼭지에 보여 준 하얀 웃음 한 뼘은 진학을 묘사한 어머니의 눈치를 알아 챈 남자가 취할 헤아림 뿐이었을까 숟가락 하나면 열 두락 들판인 시절, 길이도 무게도 아닌 머리수가 잣대였을 태양을 담을 저수지 긴 제방은 여섯 알 고동 주판으로 쌓아 세운 가계부였다 일순간 폐에 바람이 다녀간 것은 벌어 왔던 논 밭 산 허리까지 갉아먹은 길어진 병와 아버지 쪽에 누가 더 서럽게 섰을까 떠들썩했던 제사 날 화투장들 저마다 박음질해 둔..

시 글 2023.09.10

채집되는 시대

다급한 파동이 사이렌을 쫒는다 찔린 심장은 내 일인 양 조여 오고 가던 차선을 바꿔 차고 옆 친구를 흠칫하는 자동차들 신호등은 색깔의 순서를 잠깐 모른 채하고 있다 시간들은 일제히 병원 시각으로 조각되어 따라가고 응급실 눈은 두 배로 확대합니다 귀는 말귀 병실은 삼 배속 시디플레이어로 돌아가는 손 놀림들 채집한 병색은 상형문자로 말하는, 숲을 떠난 두 구루 암수 은행나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뚱이만 남겨진 절단이 렌즈에 뛰어든 사유 가끔은 건물도 종양이 되어 메스로 잘려 나갔고 빨려들어온 수배자 행방에 뒷편 조사실은 긴급 수사망이 손을 뻗히기도 했다 도시를 구석구석 스캔하는 내시경은 쉼 없는, 골목을 뒤지는 일 사이렌은 가지고 있지 않다

시 글 2023.08.28

오늘은 허공같습니다

곽 우천 오늘 날씨가 좋으니 매미 소리가 되었습니다 가다 보니 개망초꽃이 됩니다 풀이되었고 나무가 되었고 빛이 되었고 호수가 되었습니다 여인이 지나가다 던진 향수가 됩니다 달콤한 사탕입니다 걸어가는 걸음이 되었고 차례대로 일어서니 그게 내가 됩니다 경계감이 없어지고 용서라는 용서도 없는 용서 세상 일이 아무것도 아닌 시간도 느껴지지 않는 오늘은 대상을 얻음이 허공 같습니다, 아무 물도 들지 않는

카테고리 없음 2023.08.13

가을이 서다

풀잎, 눈치빠른 입추를 어찌 읽었나 귀뚜라미 소리 바구니 들고 땔렁이는 새벽 두부장수 땅 속에서 계절을 어이 돌리는지 여름에 가을을 파는 촉수 몸 속에 들어가면 나도 그리 날 더 잘 알까 울밑 봉선화 짝꿍 땅강아지 아파트 벽 사이 가을 걸어 놓고 땅 멍을 틀어대면 메아리 계곡은 더 깊어가고 늘려가던 여름 접고 멈춤으로 바뀐 홀몬 허리 쭉 편 숨 가르며 가지에 맺은 가실에 충실 하자네

시 글 2023.08.08

자유로운 멈춤

자유로운 멈춤 곽 우천 지금 난 나의 시체를 운반하는 걸 본다 집에서 병원으로 병원에서 불바다로 시공간을 잊은 공간 부모 형제의 개념 자체가 없는 슬픔도 기쁨도 없는 무의미와 의미가 무의미한 곳 내가 어디로 놓이고 가고 있는지 볼 뿐이다 나를 이렇게 보기는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다 그냥 미라인 상태이다 잠이 아닌 멈춤으로 과거도 현재도 미래의 시간이 내 몸에 가두어져 있다 불의 시간이 지나도 어떤 형태의 변화는 없다 미라를 만드는 이유가 시간의 가둠이었는가 영원을 만드는 기술 무감각 나가고 들어 옴이 없는 보존 쇳덩이가 붉게 달구어졌다가 식은 지금부터 난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다 어디에 있음은 무의미하다 어둠이 하나인 것처럼 이곳저곳은 없다 우주의 시작이 여기이고 끝이 여기이다 여기에 모두가 여기에 있다 그..

카테고리 없음 2023.08.03

그냥 사는 거라고요

말 너무 쉽네요 공부도 쉽고 노래도 쉽고 지나기가 쉽고 좀 어렵네요 사람 알아가기가 어렵고 일한 대가 받기가 어렵고 먹여 살리기가 어렵고 나를 찾기가 어렵고 너무 어렵네요 남을 이해하고 나를 낮추고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 다 내 잘못이라는 것 세상에 더 어려운 게 있을까요 난 있어 보입니다 한 우주를 품고 기르고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 입이 아니라는 것 손이요 발이요 머리끝이요 피였고 애간장이었고 참음이었고 견딤이었고 그래 그래였고 오냐오냐였고 눈물 한 방울이었다는 것 다 품으신 한 줌 어머니

시 글 2023.07.19

오란비 걷히던 날

언젠가 며느리 불러 낸 뒷동산 바위의 기약이 있었지 보리 베어낸 자리에 모를 내는 이모작 궁핍 시절은 발등에 오줌 싼다는 숨 가쁜 마을이었다 삽 한 자루 들로 나가 마른땅 한 삽 두 삽 떠 펼친 논 마지기 중천의 해는 한해를 그리 저물어갔었다 배고픔은 해도 잊을 수 있었던 걸까 올해는 몰라도 내년에는 부쳐 먹을 수 있어야 그 당겨진 혁띠를 헤아렸던 아이 아버지 기일 15 년째 해 아내로 등기해 준 마지기 논 못내 매매계약서에 도장 올린 꿀꿀함 짓던 땅 마지막, 붉은 인주가 아버지 되어 마을을 떠납니다 무릎을 친 감사헌금 언어가 서로를 위로 할 때 오란비 걷힌 후 가슴털이 그리 뽀송하였던 뒷동산 뉘인 바위 발걸음 우리를 알아보시던 날

시 글 2023.07.15

발바닥 가운데가 왜 오목한 지 (한강 생태공원 한 바퀴)

발바닥 가운데가 왜 오목한 지 (한강 생태공원 한 바퀴) 비 그친 뒤 땅은 빨랫줄에 방금 연 옷처럼 여름을 물고 땅의 근육과 핏줄을 끌어 쥐고 있다 바닥을 딛고 선 맨발 하얀 개망초 열 송이 발끝에 피워내고 밟히지 않으려면 길을 내 주거라 숲은 하늘 닫은 오솔길에 구불구불 골목길 터 주었네 가끔은 물웅덩이 세족탕을 파 놓고 조심을 파종한다 심심했던 지 길 동생 밴 어머니 배처럼 빙 돌아서 나오게 하고 여섯 달만큼 길을 늘여놨다 까치밥 된다는 찔레꽃 씨앗 아직은 푸른, 겨울 색을 고르는 중 작년에 보았던 고라니 오줌발 옆 노루오줌꽃이 대신 피어 하늘에 선물한다 살빛 브로치를 오솔길 가로지르는 작은 뱁새들 한 방향 가는 길에도 여러 길이 있다고 이쪽저쪽 파고드는 쪽숲 어둠은 소리를 집어먹고 그림자를 훔쳐먹고..

시 글 2023.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