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화롯불

마음의행로 2020. 5. 5. 22:48

 

앞 집에서 남자 목소리가 크게 났다

이상하게도 오전에 문이 열려 있었다

사람은 보이질 않고 열쇠가

그대로 꽂혀 있는 채이다

78세 아버지와 노총각 노처녀가 사는

집이다

어머니는 암으로 세상을 2년전에

마치셨다 아저씨 하는 말이 떠올랐다

병원 의사가 아내를 죽였다고 말한다

항암으로 몸이 몹시 쇠악되어 있는데

암이 줄어들지 않자 더 항암 치료를

강하게 하여야 한다고 우겨

치료에 앞서 힘을 못 이기고

돌아가셨다는 이야기였다

'나쁜 놈들 돈은 돈대로 들고...'

'어서 일어나 돈을 벌어야 하는데'

식당 운영하시던

어머니 목소리가 가슴을 저리게 들린다

그런데 아버지도 위암 수술을 받으신

몸이었다

제발이 되어 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이야기를 경비 아저씨한테 들었다

아들은 직장에 나가고 있고

딸은 코디를 하는 직업이었다

알고 보니 문이 열린 날 목소리는

아버지가 아닌 아들 노총각의 것이었다

어머니의 죽음 뒤 아버지 홀로 살아가니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있나

노총각 노처녀는 가끔 배추 김치

사다가 먹는 정도이었다

그래도 밥 짓는 것만은 아버지가

자식을 위해 전기 밥솥에 따숩게

지어 놓으셨다

그날은 벌써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몇 일이 지난 날이었다

세상에 앞집에 사람이 죽어 나가도

모르는 서울 생활이 매정함인지

너무 당연함인지 구분이 되질 않는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화롯불은

뜨겁게 이글거렸고 불고기도 굽고

국도 끓이고 반찬도 많았다

아버지 혼자가 되시니 숮불은 겨우

연명할 정도로 잦아져 있었다

아버지 마져 세상을 떠나니

남매는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노처녀는 일이 불규칙하여 밤중에

들어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새벽에 들어오는 일마저 흔함은

그녀의 발걸음 소리로 알게 되었다

목소리가 있던 날

집에 오면 밥은 있어야 하는데...

그래 오빠

내가 더 바쁘잖아 오빠가 먼저오면

밥만 좀 해놓으면 좋잖아

집에 들어오니 집은 냉냉한 헌집이요

어디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지 어디에

쌀이 있는지 해 먹은 기억은 없지

가정이 이런 모습은 아닐게다

그 순간은 남 같은 남매였다

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는 화로요

어머니는 그 안에 빨갛게 타는

숯불이었다

식구들 빙 둘러 앉으면 그게 가정이다

화로와 숯불이 사라지니 집안이

냉기가 돌고 따수운 국물 한 사발도

없고 퍼진 식은 밥마져 없는

그림이 그려졌다

둘이서 어떻게 이어 나가며 살아갈까

생각하니 안타까움이 앞을 선다

화로와 숯불이 없는 식어버린

집에서 그 둘은

어떤 가족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이어가며 살아갈 수 있을까

두 개의 열쇠 고리만이 그 비밀을

알게 할 것이다

어버이 날이 낀 오월에 아타까움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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