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어머님 생각

마음의행로 2012. 6. 17. 17:04

   어머니 하면 떠 오르는 두 가지 생각이 있다.

아버님이 오랜 병고로 인한 뒷바래지에서 얻은 모습이다.

어느날 아침 아침 식사 시간인데도 아버님이 식사하러 오시지를 않으셨다.

방으로 들어가 깨워도 말씀이 없으셔 순간 이상함을 감지하고 밥상의 가족에게 알린다.

3시간이나 걸린 끝에 의과대학 병원으로 실려가신 아버님의 병 진단 결과는 놀라웠다.

폐결핵 만기로 폐에 구멍이 나기 직전이었다.

바람이 차거운 간척지는 집에서 한 십오리 정도가 된다.

간척지를 일구기 전에 제방 둑을 쌓는 작업이 필수인데

일일이 펄을 삽으로 파서 바지게에 지고 언덕을 올라 둑을 만드는 작업을 하여야 한다.

수 셈에 강하신 아버님이 2km 가까운 제방 공사에 드는 인력과 시간 그리고 그 경제성을 산출하시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으셨다.

바로 계산 후 그 사업을 따 내셨고 많은 인력을 얻기 위해 100여리 떨어진 곳에서 까지 손을 뻐쳤다.

당시 일감이 거의 없는 시골에 겨울철 일감이 생기니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 공사를 쉽게 마칠 수가 있었다.

땅(펄)은 네모 반듯하게 파 내는데 그 크기에 따라 돈으로 환산 되었다.

그 당시 간척지의 겨울 칼바람은 바지게에 펄을 지고 가는 사람을 날릴 정도로  세었다.

장갑이 있었나, 장화가 있었나, 따뜻한 옷이 있었나,

무명 바지 저고리에, 고무신을 신으면 펄의 미끄러운 성질에 나동그라지기 일쑤니 미끄러 지니 않는 짚신을 신고 

살을 애는듯한 추위와 싸워야 했다.

2년간에 걸친 공사는 마무리가 되고 덕분에 우리집은 많은 논을 확보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병은 여기에서 시작이 되었던것 같다.

그 병에는 약도 약이지만 무었보다 고기를 그치지 않고 드셔야 한다는 의사선생님의 이야기는 우리집에 불문율이 되었다.

약값에 고기에 집은 접점 쇠약해져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1/3 정도로 가산이 줄어들고서 아버님 병은 나으셨다.

마동댁 오늘 장에 같이 갑시다? 몇가지 살 것들이 있어서 동무하고 가면 좋겠네..

어머니는 언제나 홀로 장을 보셨다.

장은 2십리나 되는 거리라 버스를 타지 않은면 아니되는 거리이다.

혼자서 그 길을 걸어서 다녀 오시는 것이었다.

왕복 4십이 길이다.

마을 분들이 버스를 타고 오가다 보면 어머니를 발견하곤 했었다.

버스 요금이 큰게 아닌것 같지만 오로지 당신을 살려야 한다는 신념 앞에선 헛되이 쓸 수가 없었다.

아마 고무신 값도 만만치 않으셨을텐데 그러나 그 의지로 아버님 병은 나으셨다.

여름철 고기는 쉬이 상하기 마련이다.

시골에서 당시 냉장고는 이름도 없는 세상이었으니 어찌 고기를 감당하고 매일 고기를 드실 수 있게 하였을까?

나즈막한 뒷 동산에는 장송들이 우람하게 가지를 뻐쳐 있고 집 옆에는 대나무 밭이 밤이 되면 참새와 산비들기를 불러들였고,

그 아래 안정되게 자리잡은 우리집은 어쩌면 누구나 갖고 싶은 큰 정원이 되는 곳이었다.

아침이 되면 두레박으로 물을 떠서 세수를 하는 우물이 있다.

그 우물의 깊이는 제법 깊어 긴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영원한 우리집 샘물이 되어 주었다.

샘은 돌로 쌓아서 둥그런 모양으로 깊이 박혀 있었고 그 돌 사이에는 고사리과 풀과 이끼가 사철을 푸르게 하였다.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한 우물은 고기를 저장하는데 가장 좋은 곳이었다.

여름에도 변치 않게 항상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니 어머님은 그 곳에 조그마한 대나무 바구니에 소고기를 넣고 

줄에 매달아 깊에 내려 보내 고기를 저정하셨다.

자연이 주는 신선한 냉장고인 셈이었다.

돌아 가시는 날 아침상에도 여전히 소고기는 차려졌었다.

 

고등학교 시절이다.

나는 도시의 변두리에 형과 함께 자취를 하며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밥짓고 국 끓이고 빨래하고 연탄불 피우고..... 그 안에 나의 생활이 많이 들어 있었다.

가장 어려운 일은 반찬을 조달하는 문제이다.

3시간이나 걸리니 수시로 시골까지 내려 갈 수도 없는 문제이고

차비도 만만치 않으니 한번 가면 많은 량의 김치를 가지고 왔다.

김치는 늘 항아리(독)에 담아가지고 왔는데 정말 남자로서 쉽게 하기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래 오후에 출발하여 밤이 되면 도착하고 짐꾼에 실어서 자취방까지 옮기곤 했다.

빈 항아리는 새끼줄로 묶어서 들고 새벽 4시 55분에 출발하는 버스에 실어서 집에 까지 갈 수가 있어 주위를 좀 피 할 수가 있었다.

김치독을 리어커에 싣고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내가 앞에서 끌고 어머님이 뒤를 따르시고 가는데

어머님의 손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 온다.

용돈하거라. 아무말 말고....

아버님 모르게 하기 위해 아버님 먼저 집에 들어가게 하시고 어머님이 리어커 뒤를 따르셨던 것이었다.

3백원이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다.

차창 밖을 보니 어머님은 손을 흔들고 웃으시고 계신다.

어서 가거라 차를 쫒겨내기라도 하듯 손등으로 차를 밀쳐 내시고 계셨다.

차는 출발하고 먼지는 신작로를 따라 길게 길게 꼬리를 이어갔다.

어머님은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리어커 옆에 서 계셧다.

3백원,

그 정,

용돈하거라....

20리 시장길과 차비 쇠고기와 우물, 그리고 용돈 3백원과 신작로 길, 

평생 잊지 못하게 하는 아버님에 대한 정성과 나에 대한 애정 그 일들로 오늘도 어머님 생각에 가슴이 먹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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