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이다.
친구들과 청계산을 오르고 3시반쯤 집으로 돌아 왔다.
요즈음 무척이나 아내가 힘들어 한다. 매가리가 빠진다고 한다. 게다가 감기까지 겹쳤으니 상상이 간다.
애들 시집을 못 보내고 쉬어야할 시기에 몸은 약해지나 애들은 말이없다.
이래 저래 심신이 다 지쳐있는 셈이다.
잠간 시장보러 간 사이에 저녁을 지었다. 요즈음은 틈틈이 일에 끼어 들어 챙기고 있다.
저녁상이 채려지고 함께 밥을 먹으려나 했는데 먼저 먹으라고 한다. 텔레비젼을 잠간 본 후에 먹겠단다.
뭐 좋은 프로가 있어? 들어보니 만화 영화 같은데?
그래 "빨간머리 앤" 이야 벌써 10번 이상은 보았을 것이다.
신 짱구, 엄마찾아 3만리, 검정 고무신 등 만화영화를 그리도 잘 본다.
아린이가 나오니 어린이 만화라고 하겠지만 사실은 어른이 보아야 할 만화 영화이다.
어른들이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사실 연속극을 보면 내용도 내용이러니와 연기자들의 가식적인 행동이나 언어에
이미 생명력을 우리 부부에겐 잃은지 오래이다.
교육 방송의 다큐나, 동물의 왕국, 세계 여행 이야기, 축구, 러브인 아시아, 가보고 싶은 곳, 내 마음의 여행 등
배우들이 나오지 않는 것들만 찾아 보는 것 같다.
그들이 나오는 프로 그램은 머리만 아프다. 남는 것도 배울 것도 거의 없다.
오늘도 빨간머리 앤을 보고 난 후 저녁을 아내 혼자 먹는다.
나는 그 때마다 속으로 눈물을 삼킨다.
"빨간 머리 앤" 그 속에 들어 있는 삶의 이야기 중에서도 꿈을 가지고 살아가고, 이루어 가는 내용을 보고 또 보았을 것이다.
남자에게도 물론 꿈은 많다. 그 꿈 중에는 자신을 위한 것도 있지만 대 부분 자신의 일을 가지고 가족을 잘 이끌어 나가고
각 가족이 가진 꿈을 이룰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원하여 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싶은 것이 보통이다.
그 만화 영화를 보면서 아내의 머리에는 분명 그 옛날 이루고자 했던 꿈에 빠져 있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고 현실을 돌아 보면서 나에게도 저런 꿈이 있었는데... 하는 아내 그 모습을 보는 나는 너무 마음이 아프다.
아직도 애들은 설흔이 한참 넘어도 시집을 안 가고 있어 애들을 생각하면 이제 살 힘마져도 빠진다는 것이다.
여보 나는 당신이 퇴직하고 나면 우리 둘이만 살게 되고 그동안 못했던 것 하고 살고, 여행도 하고 살고, 집도 예쁘게 꾸미고
배란다에 그 기르고 싶은 식물들, 좋은 햇빛에 실컨 키우리라고 생각하고 살아 왔는데 아직도 애들 밥해주고 빨래 해주고
뒷치닥거리 하는데 내가 이집 식모가 아니면 이러지는 않을꺼야.
나는 아무 말도 못한다.
시집와서 고생도 그렇게 많이 했고 근검이 생활속에 절여 있는 아내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내가 아내의 꿈을 접게 하였던 장 본인이 아니었던가. 처녀 시절에 가졌던 꿈, 희망 다 져버리고 살림만 35년을 하여 온 아내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자신을 버려 가며, 아니 비워 가며 부처처럼 살아 왔을까?
이 생각 없는 나를 아내는 뭐라고 하며 살고 있을까?
그 많은 세월 동안 나는 아내에 대한 스스로의 배려가 한번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나를 버리면 상대방이 보인다고 어느날인가 부터 몇가지 결심을 실행에 옮겼다.
아내가 싫어 하는 것을 하지 않는 일이다.
맨 먼저 어떤 모임에 나가는 것을 하나 끊었다. 함께 나가보면 불편하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빠지기가 아려운 모임인데 아내 뜻대로 실행을 했다.
내 마음이 무척 가벼워 짐을 느꼈다. 그리고 보니 나의 욕심에서 내 중심적인 생각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두번째는 골프를 끊었다.
친구들과 같이 나가기 때문에 거절이 어렵고 그 거절이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선뜻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35년에 껍질만 남아 버린 아내의 몸과 마음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뭘까?
나는 나를 작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
그리고 아내가 해왔던 일들을 하나씩 내가 하여 나가는 것이라 생각을 하고 있다.
비록 "빠간머리 앤" 과 같이 되돌릴 순 없겠지만 지금부터라도 아내의 짐이 가벼워져야 한다고, 그것을 이행할 것이라고......
여보! 그동안 나만 즐겁게 살아 왔잖아, 출장이다 하면서 미국, 대만, 일본 많이 갔다 왔잖아 ..
이젠 당신이 즐겁게 살 차례야 친구들과 해외 여행도 나가고, 끊어졌던 친구도 복원하고, 먹고 입고 싶은 것도 하고 말이야,
"빨간 머리 앤" 은 못했어도
'하얀 머리 앤" 은 할 수 있게 꼭 밀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