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글

오래 전에 죽은 적이 있다/정병근

마음의행로 2010. 6. 10. 08:11

 

 

오래 전에 죽은 적이 있다



나의 前生은 일찍이 끝이 났다

반란의 불길을 가까스로 피해

결사 항전의 칼을 갈 때

힘이 다한 몸의 장렬한 玉碎를 결심할 때

푸른 불똥을 가진 짐승의 시간이

한 순간 내 목숨을 앗아갔다

나는 오래전에 죽은 적이 있다

나는 한 때 나를 옹호하는

걷잡을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너를 물어뜯은 적이 있다

너의 살을 뚝뚝 씹으며 포효한 적이 있다

죽이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피의 날들,

주체할 수 없는 증오 때문에 너를 숙청한 적이 있다

너를 제거하기 위해 가장 은밀한 시간의 틈새로

자객을 보낸 적이 있다

나는 알 수 없는 분노로 책을 태우고

사람의 목을 댕강댕강 날린 적이 있다

피가 분수처럼 튀어오르고 하늘이 갈기갈기 찢기며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었다 무서운 줄도 모르고

붉은 노을이 건지러워 옆구리를 긁다가

피묻은 칼을 후두둑 던진 적이 있다

반성도 없이, 나는 갈 때까지 가다가

내 손으로 내 눈을 찌르고 내가 내 무덤을 파서

오래전에 비참하게 죽은적이 있다

너에게 처형당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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