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

마음의행로 2009. 3. 13. 11:29

글쎄!!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

뭐 살아가는 것 자체가 모두가 힘든 일이지만,  그 중에서 하나를 끄집어 낸다면 ....???

사람은 환경에 따라 어렵다는 일이 다 다를 수 있다고 생각이 들기는 한다.

여자분이라면 아이 낳는 일? 학생이라면 대학 입학시험 준비?  남자라면 승격? 연인끼리라면 실연에서 오는 고통?

연애인이라면 인기도 관리? 아니 미모 관리?  이러다간 날을 다 세워도 아니되겠다.

 

매슬로우의 욕구의 5단계가 있다. 먼저 의식주에 대한 욕구가 가장 앞서는 욕구라고 한다. 정말 그런것 같다.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사람은 무슨 짓이라도 하려고 할 것이다. 감옥에 가더라도 서슴치 않을 것이다.

삶의 가장 바닥이 해결되지 않고서야 그에겐 희망을 찾아 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주변에는 이런 부분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에게 무엇이 가장 힘드냐고 뭍는다면 당연 의식주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꼭 그것이라고 말하여야 할 것인가는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먹고 입고 잠자고 하는 문제는 자신의 주관에 따라서 자유로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안전의 욕구, 사회적인 욕구, 존중의 욕구  마지막으로 자아 실현의 욕구가 있다.

뒤로 갈수록 단계가 정신적인 욕구 단계로 흐름을 살펴 볼수가 있다.

 

이런 욕구의 뒷면에는 아니 바닥에 깔리우는 것은 인간 관계가  깊숙이 내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 관계가 쉬울 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에게 어려움이라고 말하여 지는 것일까? 

아무래도 상호 갈등의 해소가 아닌가 생각을 한다. 갈등에도 해소될 것이 있고 해소되지 않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이것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연이 없어지거나 줄어드는 것이 너무 많다. 소위 세상사적인 것으로 대부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해소되지 않는 갈등,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고 새로워 지는 갈등, 마음에 상처를 깊이 남겨 놓은 갈등,

나를 해방 시키지 못하고 스스로 감옥에 가두어 놓고 자신을 농락하며 점점 더 깊이 파고드는 갈등이 있다.

이런 갈등을 물질적이나 사물적이 아닌 인간적이고 정신적으로 해소할 수 있게 하는 무엇이 있다면 ?

그것을 나는  용서라고 말한다. 

용서는  "네가 나를 괴롭혔으니까 나도 너를 괴롭히겠다는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라는 말이 있다.

 

TV에서 용서하는 장면을 가끔 만나게 된다. 보통은 부모와 자식간의 일이 다 반사이다.

집안 형편으로 자식을 나두고 떠나야 했던 어머니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용서하고 서로 만나 껴안고 눈물 흘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모습은 끝나고 나면 우리는 뒷끝이 말끔하다.

 

그러나 두 집안 원수지간이 되고 자식들 간에는 사랑의 연인이 되기도 하고 자식들이 서로 부모의 원수를 끝까지 따라가서 갚는 일도 보게 된다. 

또 살인자로 인하여 자식을 잃어 버린 부모가 살인자를 용서하고 자식으로 삼는 예도 있다.

이런 내용들을 보면서 과연 용서가 되어 지는 것일까?  할 수 있는 것일까?  깊이 생각하여 볼 때가 있다.

용서에는 항상 관계가 있다. 그 대상이  대부분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서로 뜻을 이해하고 여기에 동의를 얻어야만 이루어 질 것이다.

한 사람만으로는 용서가 이루어 질 수가 없다는 것을 발견 할 수 있다.

어떤 경우는 상대는 전혀 모르고 있는 경우도 있다.

세상이 그리 돌아가는 것이니까? 그렇게 밖에 되지 않겠나 정도이다.

그러나 본인은 그 내용이 나로 인하여 진행되었음을 알고 있어 괴로워 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쥐어 주어 사건을 만들어 가면서 용서를 구할 수도 없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이럴 때는 누구에게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인가? 신이 아닌가 싶다. 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용서를 받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용서가 어떻게 이루어 지는가를 보면 대 부분 매개체가 있을을 발견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 전에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한다.

그는 왜 스스로 용서를 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통해서 용서를 간구하는 것일까?

TV에서도 왜 모자간에 하지 못하고 방송의 힘을 빌어서 용서의 기회를 갖고서 용서를 하는 것일까?

여기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진정한 용서는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누구의 힘을 빌어서 용서가 더 쉽게 이루어 지도록 요구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용서의 범위를 확대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된다.

정말 뿌리까지도 뽑아 낼수 있는 용서를 할 수 있는가?

과연 용서를 한다는 말을 감히 이야기 할 수 있는가?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이 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다고 보여 진다. 

진정한 용서는 내가 아무것도 바램이 없는 진공 상태가 되었을 때  이루어 질수 있는 것이 아닌가?

조그마한 티끌이라도 남아 있다면 용서라고 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과연 용서는 이루어 지는 것인가?

나는 아마도 크기를 줄일 수는 있으나 완전한 용서는 없다고 말하고 싶다.

 

"멍청한 사람은 용서하지도 잊어버리지도 않는다. 순진한 사람은 용서하고 잊어 버린다. 현명한 사람은 용서하되 잊어버리지 않는다" 라고

정신의학자 토머스 시스는 말 합니다. 여기에서도 용서가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보여 주는 말이라고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용서를 해야 합니다. 멍청한 사람은 되어야 하지 않기 때문일까요?

천주교에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 나 때문입니다" 라고 합니다.

이 말을 깨닫는 자 만이 용서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나는 믿고 싶습니다.

 네 탓이 아닌 나의 탓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 말입니다. 모든 것이 다 내탓이 아니겠습니까?

또 하나는 용서하지 않으면 분노와 원망이 나를 더 깊은 수렁으로 몰고가 스스로를 자멸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는 상대 때문이 아니고

나 스스로 만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는 지금 이 시간에 아름다운 꿈속이나 멋진 여행을 즐기고 있을 줄도 모릅니다.

 

완전한 용서는 할수 없다고 봅니다. 다만

그 범위를 확대하여 피해를 줄여  나가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혼자서는 하기 어렵기 때문에 다른 사람, 또는  매개체를 이용함이 훨씬 쉽게 용서에 이르는 방법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나 스스로를 위하여 용서를 하여야 할 것으로 봅니다. 

그 속박에서 빨리 벗어 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것들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용서는,

누구 보다도 더 사랑하여야 할  가족간의 용서가 아니겠는가?  

깊이 생각을 하여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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