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무더운 여름이었다.
마당에는 하얀 천막이 두개나 쳐있고 마을 사람들이 이리 저리 모두 분주하다.
한쪽에서는 돼지를 잡아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고 붉은 빛갈의 지라가 몸에 좋다고 칼로 베어 나누어 먹는다.
몇일은 이것으로 포식할 요량으로 칼질이 바쁘다. 돼지를 잡으면 내장은 그들 차지가 되는 모양이었다.
헛간쪽에는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친척 여자분들과 동네에서 일 잘하기로 제일가는 분이 음식 만드는데,
호령겸 챙기기겸 바쁜 말들이 오간다.
광에서는 삼베로 수의를 만드시는 분들의 땀이 줄줄 흐른다. 그때만 해도 크고 작은 수의를 모두 직접 만들어서 상주들에게 입혔다.
아버님은 부고장을 쓰시느니라 여념이 없으시다. 빠진데 없는가 잘좀 살피거라. 아 저그 배나무골 아재는 썼던가? 안썼을 것이요.
작은아버님이 옆에서 챙기시는 모양이다.
전화도 없는 세상이라 부고장을 한 동네에 한장씩 써서 인편으로 전달하면 그 마을 친척이 마을 모든 친척에게에 전달하는 방식으로 상을 알렸다.
3일장이라서 정신없이 바쁘게 일을 치루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나 이런 일에 마을 사람들은 요즈음으로 말하면 소위 협업이 잘되어 누가 무엇을하고 또 누구는 무엇을 하고,
착착 정해져 일이 느린것 같지만 척척 짜맞추어져 진행에 막힘이 없다.
저 애는 뭣을 안다고 저리 슬프게 운다요? 째그마한 것이 뭣을 다알까? 참 밸스랍기도 하네.
그래도 먼가 아니까 울것제. 나를 두고 이웃집 아주머님들의 이야기가 나를 향한다.
나는 생여 뒤를 따르면서 이제는 증조 할머님을 다시 볼수 없다는 것을 다섯살 나이에 알고 있었다.
어어너얼 어어너얼 어리랑어엉차 어와널 마을 무당집 큰 아들이 생여 앞쪽에 올라 큰 소리로 외치면,
마을 청년들은 생여를 어께에 메고 함께 외치며 마을을 벗어나고 있었다. 여름 비는 세차게 내렸다.
신작로를 지나 산 입구에 들어서는데 길은 좁고 고랑이에는 물이 가득한데,
길은 미끄러워 생여가 뒤로 밀렸다가 앞으로 갔다가 산등성이 쪽으로 몰고 가다가 다시 내려오고를 반복을 하고 있었다.
생여가 비탈길이라서 한쪽 사람들은 머리까지 올리고 한쪽 사람들은 무릎밑에서 들고를 수십반씩이나 하고서는 좀 나은 길로 접어들자 모두들 쉬어가자고 한다.
이렇게 힘들기는 처음이라면서 그러나 누군가 말을 큰소리로 한다.
쉬면 안돼 힘들어도 끝까지 한번에 가야돼 어서 힘들 내라고 어서들 나는 울었던 울음이 진즉 말라 있었다.
그 분들의 몸부림을 보면서 내가 몸살이 날지경이었다.
묘지는 30리나 떨어져 있는 건너 마을 치마 바위 윗쪽 제일 높은 바위산을,
묘지에서 15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큰 바위 두개 틈새 사이를 바라 볼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지관들이 명당이라고 입으로 설명을 하고 있었다. 나는 묘지를 파는 곳을 떠나지 않고 보고 있었다.
비가 너무 많이 내려 묘 안으로 물이 들어가지 못하게 주변에 골을 둥글게 파서 다른 곳으로 물이 흘러 가도록 하고 있었다.
관이 내려가자 가족들은 곡을하기 시작하였고 할아버님이 맨 먼저 흙을 삽으로 떠서 관위에 부으셨다.
따라서 마을 사람들이 삽으로 흙을 떠서 묘 구덩이를 메꾸고 있었다. 나는 이런 관경을 하나 하나 셈을 하듯 머리속에 집어 넣고 있었다.
야 저년이 내것을 빼앗아 먹을려고 뺜히 쳐다보고 있는 것좀 봐 저년좀 봐. 못된 년 같으니 ...어이 저리 안가 큰 소리가 난다.
어머님이 증조할머니에게 애가 멋을 알것쏘~ 미워하지 마세요 하신다.
아니야 저년이 내것을 뺏어 먹을라고 그래, 어머니는 얼른 여동생을 다른 곳으로 보낸다.
산소에 가기전 산골에 조그마한 옹달샘이 있었다.
그 옹달샘은 아랫쪽 몇마지기 논에 물을 대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소중한 셈인 셈이다.
일년 열두달 내내 마르지 않아 물이 필요치 않을시는 옆 또랑으로 흘러 가도록 해놓고 있었다.
그해 봄 어느날이었다. 나는 지나가다가 옹달샘을 보니 고기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순간 나는 고기를 잡아다가 증조 할머님을 드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괭장히 좋아하실 모습이 눈앞에 어렸다. 고무신짝을 벗어서 그것으로 물을 퍼냈다.
물은 계속해서 나오고 있어 내가 이기나 물이 이기나 씨름이 벌어졌다.
나는 그럴수록 열심히 퍼냈다. 내가 이겼다. 재빨리 나는 바닥에 누워 있는 고기부터 잡아 다른쪽 검정 고무신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풀섶 속에 있는 고기도 손으로 뒤져서 잡아내었다.
고무신 한족에 고기가 가득하고 다른쪽 신발에도 고기가 제법있었다.
마음이 어찌 기쁘고 바쁜지 빨리 달려가 어머니에게 보여드려야 했다.
500m는 충분한 거리를 두손에 고무신을 들고 나는 열심히 걸었다. 천이가 고기잡아 왔습니다. 할머님 잡숫게 하고 싶었는가 봅니다.
그날 저녁 증조 할머님은 송사리 같이 작은 물고기 찌게를 그렇게도 맛있게 잡수시면서 또 잡아 올거제 이쁜 내 새끼야.
그걸 넘보던 바로 아래 여동생이 그만 찍힌 것이다. 빼앗아 먹을려고? 그래 증조 할머님께서 마구 욕을 하셨던 것 같다.
조금은 죽음 앞으로 가 계셨던 것 같다.
돌아가신지 50년이나 됬는데 꿈에 증조 할머님이 나타나신다. 무덤 안은 습기가 가득하다.
증조 할머님은 말씀은 없고 죽으신 것은 분명한데도 살이 물시레 물시레 꾸물 꾸물 움직이신다.
나도 아무 말도 나오지 않고 이런 할머니를 보고만 있을 뿐이다.
이런 똑같은 꿈을 세번이나 꾸었다.
이상하다.
왜 이런 꿈을 꾸는 것일까? 좋은 꿈은 아닌것 같고 그렇다고 특별히 나쁜 꿈만도 아닌듯한데 뭔가 느낌은 와 닿는 것 같다.
그해 이른 봄 할아버님이 산소에 한번 가자고 하시기에 따라 나섰다.
나는 소나기 같은 비속에 치러진 장례를 떠 올렸다.
증조 할머님은 어떤 모습이실까? 왜 나한테 그런 꿈을 주셨을까? 답답한 마음을 전하시려고 하신 것은 아닐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천이야 너 이리 오거라. 예 할아버님 네 증조 할머님 산소를 먹뺑이 명당으로 옮길려고 한다.
왜요. 아무래도 그곳이 이곳보다 더 좋은 자리일 것 같다.
언제 옮기시는데요. 올 봄이다. 나는 그것이 맞다고 속으로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 거렸다.
증조 할머님 산소를 다시 찾은 것은 가을 시제때였다.
양지 바른 곳에 고조 할아버님 할머님 아랫쪽 이었다.
증조 할머님 이제 갑갑하고 습기차고 안하시지요. 인사 받으세요. 천이예요. 나는 마음이 상쾌하고 시원하였다.
어쩌면 할아버님께서도 같은 꿈을 꾸지 않으셨겠나 나는 짐작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봄이면 꽃들이 주변에 피고 새가 울었다.
바람은 살랑거리고 휘어 휘어이 노래를 불렀다.
가을의 묘지에는 따뜻한 햇볕으로 잘 말라 있었다. 장마도 없었고 주변 물 구덩이도 이젠 필요 없어졌다.
어어너얼 어어너얼 어리랑어엉차 어와널,,,
무당집 큰 아들의 목소리는 20리나 떨어진 옛 치마바위 윗쪽 바위산을 바라보는 물 구덩이 같은 명당에서,
온 몸이 이제 쑤시지도 않고 뼈가 살아날 것만 같은 먹뺑이 명당으로 돌아와 잠이 들었다.
증조 할머님은 고시런한 자리에 계실 것이다.
이제 편히 주무시게 되셨는 것 같다.
나는 그 뒤로 다시는 증조 할머님 꿈을 꾸지 않았다.
물 구덩이 같은 곳에서 나오신 할머니께서 꿈을 주시지 않은 것 같다.
증조 할머님 편히 주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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