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여행

여름 휴가

마음의행로 2009. 1. 8. 18:01

여보  올 여름 휴가는 어떻게 할까?

전에는 윗분들 눈치 보느라고 조직생활  하면서 5일간의 휴가가 잘해야 2박3일 이었다.

그런데 어떤 바람이 불기 시작했는지 5일을 다 이용하는 쪽으로 이동하여 나가고 있었다.

모처럼 5일간을 쉬려고 하니 가는 곳이 달라져야 할 것 같고 일정에 맞는 스케줄이며 따르는 비용이 전과는 다르게 바뀌지 않으면 안 되었다.

비용도 생각하여야 하고 일정도 어찌 잡아야 할까를 간접적으로 묻는 이를테면 아내의 속을 들여다 보는 다소 작전이 들어 있는 질문이었다.

글쎄 5일간을 가보지 않았는데 가고 싶은 곳이야 많지만

여러가지가 걸리는데 애들도 많이 컷지만 남겨 두고 가기는 가야하겠고

남겨두면 밥이나 제대로 할 것인지 애들 공부에는 지장은 주지 않을련지 쉽지가 않네.

역시 아내도 쉽지 않기는 하지만 나보다는 머리가 더 복잡했던 것이다.

 

한참을 지난 뒤 아내의 이야기는 나를 놀라게 하고 있었다.

"남들은 부모님 해외 여행이다 뭐다 해서 여행을 보내 드리는데 우리 형편에 거기까지는 무리이고,

어때요 부모님 시골로 가서 근방에서 부모님과 함께 여행을 하면은?

부모님도 연로 하시고 함께 여행을 한다는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을지도 몰라" 하는 말이 나의 귀에 달라 붙는다.

나는 어쩌면 가장 형편에 맞고 부모님과 함께 할 수 있어 마음이 은근하였다.

그렇다고 당장 오우케이 하고 나서기도 그렇고 하여 비용은 좀 절약 할 수있겠지?  하고 여운을 남겼다.

조금 후에 그렇게 하자고 아내가 이야기를 하기에 밀린듯한 마음으로 그렇게 하기로 응답을 하였다.

 

어이 상흠이  상흠이 있는가? 

아침 일찍 부터 우리 마을에 말(馬) 한필로 생계를 꾸려가시는 아버님 동갑 계원 분이 시골 우리집 마당으로 들어서면서 아버님을 부르신다.

어쩐 일이여 아침부터 이렇게 나서는 것이? 아 그 해남 대흥사 가는 일에 상의도 좀하고 해서 왔네.

때는 새마을 운동이 한참 정진을 하던 때라 열심히 일하면 잘 살수가 있다고 마을 모든 사람들이 뭉치던 그 때 이었다.

자네는 자전거가 일제로 우리 마을에서 좋은 것이 있으니가 걱정이 없겠네만

나는 이번에 새로 하나를 사야 할지 아니면 헌 것을 그대로 몰고 가야 할지 영 마음을 정할 수가 있어야지.

그래 어쩌면 좋을 것인가 싶어서 왔네. 가격도 만만치 않을 것이고 중고로 좀더 싸게 사서 가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자네 의견은 어떤가?

 

한참 있다 아버님 차레가 되어 뭔가 말을 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해남 대흥사 까지는 거리가 만만치 않을 것 아니겠능가? 새벽에 출발하여도 오후에 도착할 것인디 자전거가 좋아야 하지 않것능가.

가다가 빵구라도 나면 열 한사람 모두 허탕을 칠 수도 있을 것 아니것능가?  

그렇게 보면 새것으로 이참에 하나 바꾸어 버리소.

그래 나도 그것이 맞것제 하면서도 돈이 쬿게 부족해서 마음을 못 잡고 있었네.

아 그러면 말 한번 더 굴리면 되지 오늘 저녁 쇠죽 잘 긇여 먹여서 힘 한번 더 쓰게 하소.

기분 좋게 새 자전거로 씽 한번 갔다가 오게.

그게 맞것제 그럼 자네 말 듣고 오늘 당장 삼천리로 하나 뽑아야 쓰것네.

그러면서 일어 서신다.

 

벌써 가려고 아침이나 같이 하고 가소 가 봐야 혼자 일 텐디.

밥끌여 줄 사람도 없지 않는가 우리집 반찬에 한그릇 하고 가소. 그러면 그렇까?

마동댁 너무 눈치하지 맛시요 잉. 아따 무슨 말씀이랴요, 숱가락 하나 더 놓으면 되는디.

어서 올라 옷시요. 토방 마루에 걸터 앉았다가 고무 신발을 벗고 올라 서는 마구정 양반이다.

 

이 일로 마을이 시끌 벅적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자전거를 못 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자전거만 준비하면 만사가 잘 이루어 질 것이라고 당연지사이다.또 그게 맞는 말이고...  마을에 이 일로 활기가 더 붙었다.

나는 시골에 가면 어디 어디 둘러가야 할지를 생각을 하면서 이 여행에 의미를 부여 하고 싶었었던 같다.

두 분을 모시고 두째 아들 며느리가 함께 여행을 한다는게 마음 한구석이 넉넉하면서도

장인 장모님이 안 계신 아내를 생각하면 마음이 짠했다.

아마도 모르면 몰라도 시 부모를 친정 부모로 바꾸어 생각을 좀 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하여 보았다.

 

그래 이러면 어떨까 아버님이 젊었을 적에 다녀 가신 해남 대흥사를 그 뒤로 처음 다시 가보시게 하는 것이

어쩌면 그 젊었을적에 꿈에 부풀었던 여행길을 다시 생각나게 하여 지지 않을까?

열 한 분이 한 줄로 늘어서서 긴 대형을 갖추고 자갈 밭 같은 울퉁 불퉁한 신작로를 따라

그 먼길을 갔던 추억의 길 가다가 큰 냇가를 만나 자전거를 들고 무릎 위까지 오르는 물길을 건너셨다는 그 길,

대흥사에는 본당에 청기와 한장이 지붕 한가운데  있다는데 꼭 그것을 보고 와야 한다고 하시던 말씀들이 떠 올랐다.

맞아 그리로 하는게 좋겠어 한곳은 그 곳으로 정해.

  

다음은 어머니 차례인데 어디가 좋을 꼬........

여보 어머님은 어디로 가시는 것이 좋다고 하실까? 

당신이 같은 여자 이니까 마음을 나 보다는 더 잘 알 것 아니겠어? 

글쎄 친정에 한번 가보면 어떠실까? 옛 생각도 떠 올리시고 친척도 조금은 남아 계실 것이고? .....

 

그렇다 바로 그거다 이제 다음은 양념 길만 남았다.

추가로 돌아 볼 곳만 더 넣으면 될 것이었다. 그것은 당신의 고향 근처니까 알아서 나는 따라 갈테니까.  

나는 강진에 다산 초당을 점을 찍었다.

그리고 윤선도 생가와 유물관, 마지막으로 완도에 가서 해물을 맛있게 드시게 하는 여행 길을 만들어 놓았다.

이제 차만 잘 준비하여 무사히 여행을 다녀오는 일만 남은 셈이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당일은 내려 가는 것으로 끝이 날 것 같아 가까운 도갑사를 아내와 찾았다.

신혼 여행 마치고 시골 집에 들려서 잠간 가본 곳이다.

그 뒤 본당에 불이나서 전소하여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기둥에 홈이 패여 나이든 할머님 얼굴 같던 기둥들이 매끈하여 진 것으로 모두 바뀌었으니

옛 맛은 간 곳 없고 새로 찾은 절 같은 기분이 든다.

해남 대흥사와는 이곳이 지금은 비록 작아 보이지만 전에는 훨씬 큰 절이었다고 국민학교 소풍 때 선생님이 들려 주신 말이 생각이 난다.

여기가 형님 절이고 대흥사는 아우 절이었단다.

 

아침 일직 서둘러 부모님은 뒷 좌석에 우리 부부가 앞 좌석에 앉아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부모님의 얼굴엔 수학여행 가는 듯한 느낌을 찾아 볼 수가 있었다.

 다행이었다. 좋아하실까? 걱정도 했었는데 ...  다산 정약용이 20년간 머물다가 많은 저서를 남기시고 떠나 가신 곳 초당을 찾았다.

망향을 달래려고 지은 망향대에 들어서니 마음이 답답하여 진다.

얼마나 가족들이 보고 싶고 함께 유배 오시다가 영산포 삼거리에서 영광으로 장소를 바꾸어 가신 형님 생각들이 났을까?

내가 마치 유배온 듯 바람 마져 없어 숨이 더 막힌다.

 

해남 대흥사로 가는 길에

아버님이 아 저기가 바로 우리가 자전거를 들쳐메고 건넜던 냇가란 말이시 지금은 다리가 좋게 놔져 부렀구만.

이곳 저곳을 둘러 보시면서 옛 생각에 마음이 바뿌신 것 같으시다.

조용히 어머니는 듣고만 계신다.

 

이제는 대흥사 길이다. 대흥사 하면 무엇 보다 입구에 서 있는 적송 군락이 장관이다.

옛 날이나 지금도 큰 변함이 없는 것 같았다. 가장 귀한 것은 천불전이다. 

천 스님을 만들어 모신 곳으로 지나가면서 과연 천개인지 세어 보느라고 앞 친구와 사이가 많이 떨어져 재촉을 하던 선생님들이 생각이 난다.

과연 본 당에는 지금도 청기와가 한장이 그대로 있을 것인가가

 아버님의 마음 가운데 계셨던 같다.

뭐 그리 소중하지도 않는 것 같지만 옛날에는 이런 것을 본 사람과 보지 못한 사람간에 무척이나 차이가 있어 자랑거리가 아닐 수가 없었다.

깊은 수로를 아래로 한 돌 다리를 지나면 본당 대웅전이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대웅전은 수리하기 위하여 지붕위에 천막을 덮어  놓았다.  

이를 어쩌나 내 마음 한구석이 비고 만다.

아버님도 섭섭한 모습이 역역하지만 여행에 어떤 착오라도 생길까봐 여유를 보이시면서

그래도 옛날 자전거로 용감하게 열 한명이서 왔던 감회에 젖어 보시는 것 같으시다.

아내는 나의 설명에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도 좋아 하시잖아?  그럼 꼭 옛 것과 같아야만 하는 것은 아닐테니까.

애써 나도 마음을 잡아 본다.

 다음은 완도로 가서 싱싱한 회를 드시도록 하는 길이다.

 처음 가는 길이라 이리 저리 물어서 완도에 들어 섰다. 바다가에 상가들이 죽 늘어져 있다.

어디로 갈까? 생각하다가  아버님 저기가서 회를 좀 드시고 가시지요 어머님도 고기보다는 생선을 좋아 하시 잖아요.

아버님이 어머님과 상의 하시더니 아니다 저곳에 매운탕이나 맛있게 끓여 먹고 가자.

아마 두 분이 값이 비쌀 것 같아 합의를 한 모양이시다. 괜찮아요 가격 염려 마시고 저희들이 가는대로 가시지요? 

아니다 네 어머님이 마음이 조금만 불편해도 토하니 그리 따르기로 하자 끝네는 우리가 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바닷가라서 매운탕의 맛은 시원하고 맛이 훌륭하였다.

바닷가를 거닐고 완도의 유명한 전복 양식장을 둘러 보고 다음 길을 재촉하였다.

 

내 벗이 몇이냐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섯 밖에 더 두어 무엇하리.

윤선도의 오우가 이다.

나는 이 시를 지금도 그대로 외우고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형님이 전교 붓 글씨 대회에 최고상을 받은 내용 이었기에 나는 옆에서 여러번 다시 쓰고 쓰고 하여 제출한 것이라

옆에서 보고 오늘에 까지 외워 지워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배를 젓는 소리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하며 글을 지었던 윤선도에 공감했던 것을 보면

나도 시인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지금도 해 볼 때가 가끔 있다.

윤선도의 생가는 정말 큰 저택이었다.

여러채로 나누어져 있으면서 균형을 이루고 있고 높은 담장이며 굴뚝 대문들이 옛날에 큰 가문의 집이라는게 역역하였다.

해남은 날씨가 옛날에도 따스워 동백나무가 많았고 겨울에 배추를 뽑지 않고

밭에 그냥 두었다가 봄에 한 두통씩 가져다 쌈도 싸먹고 김치도 조금 담아 먹기도 한다.

지금은 열대 지방에서 생산되는 다래 종류인 키위가 많이 생산이 된다고 한다.

 

마지막 길인 해남의 외가집을 가는 차례이다.

아마도 어머님의 마음이 설래였을 것이다. 외가 집은 이층집이었다.

초가 집이긴 하나 이층에 제법 널다란 다락 같은 방이 있어서 놀러 갈 때마다 숨박꼭질 하면 이곳에 숨기가 일쑤였고

정말 부자집 같은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곳 이었다.  

항상 가면 외할머님의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고 외 할아버님의 재담은 동네에 소문이 나신 분이었다.

 

들어가는 길 옆에 큰 이모님 아들 내외가 사는 곳에 들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옛 외가 집으로 차를 몰았다.

전에는 차는 갈 수가 없는 길이지만 이제는 넉넉한 길로 되어 있었다.

시골 흙길이라 감촉도 많이 달랐었다.

입구에 들어서니 왼쪽으로 냇가에 우거져 있던 동백 나무숲이 우리를 맞는다.

그 나무에 올라가서 대나무로 만든 조롱대를 꽃 속에 넣어 꿀을 한 없이 빨아 먹던 그 동백 나무들이다.

입구 왼쪽엔 소 외양간이 있었었고 오른 쪽엔 터밭이 있었다.

가운데 길로 올라 가면 집 왼쪽에 조그마한 옹달셈이 하나 있는데 사철 마르지 않는 이곳에서 물을 떠다 정지물로 삼았다.

뒷 동산에는 대나무 밭이 있어 이곳에서 대나무를 베어 낚시대를 즉석에서 만들어 방죽으로 가서 낚시하던 생각이 난다.

 

이때 어어님은 무슨 생각들을 하셨을까? 

그 많던 세월이 지난 지금 부모님도 안 계시고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곳 일남 오녀 중에 삼녀로 

그 재미 있게 사시다가 아버님한테 시집와서 고생 많이 하시고 ....   이런 노후에 다시 찾아 온집,

옆에 큰 외가집이 있어 오손 도손 사시면서 마을에서 노래를 제일 잘해 늘 뽑혀서 노래를 하곤 하셨다는 고향집,

봄날에는 나물캐러 나갔셨던 넓은 들판,

외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다른 이모는 교회 다닌다고 절을 하지 않자 혼자서 절을 하시던 마당 앞길, 

가재가 많아 돌만 떠들면 잡을 수 있었다는 그 냇가, 숨박꼭질, 고무줄놀이 수 많은 상념이 어머님을 사로 잡았지 않았나 생각을 하여 보았다.

 

어머님은 별로 말씀이 없으셨다.

그 어렵게 넘어 외가집에 와서 식량을 얻어 가셨다는 말씀의  가리재 고개 산,

내가 그 많은 생각들이 마구 쏱아져 나왔는데 어머님은 어떠 하셨을까?  

세월아 그 많던 세월아 다 어디로 갔느뇨.

한 많고 울음 많고 억척 같이 살아온 세월들 6.25의 그 삶과 죽음이 순간이던 시절에 우리를 키우기 위해 배 골고

식량이 없어 밥을 못지어 빈 솥에 물만 붓고 불을 지펴 냉갈피워 밥하던 척을 했다는 그 세월들....

 

나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차마 어머님을 바라 볼 수가 없었다.

그저 죄송한 마음 뿐 어떤 위로도 어떤 말도 필요치가 않았다.

가만히 옆에가서 어머니 어께만 잡아 드리고 속삭였다.

어머니 가야 할 시간이네요. 벌써 다섯시가 넘었습니다.

 

그래 가야제 어서 가자 우리집으로 가자.  

한번 더 돌아 보시더니  갑시다 하며 아버님을 재촉한다.

아버님도 마음이 서리시는 것 같다. 어찌 살다가 이제야 고향을 찾을 수 있게 하였을까?

 더 부자로 잘 살 수 있었는데 하염없는 생각들이 스쳐가는 모습이시다.

 

나는  이 여행길을 다녀와서 한 없는 감회에 젖었다.

여보 정말 고마워 부모님한테 미움 받게 한것 모두 내 탓이지,

멍청하고 순맹한 아이같은 남편 아니었는 감.

미련하다 못해 병신 같은 남편 아니었는 감.

 

이런 좋은 여행을 부모님께 선물 드릴 수 있게 하여 준 아내에게 너무나한 고마움과 미안함에 져린다.

어머님 아버님 죄송해요 해외 여행 한번 못 시켜드린 것. 그리고  키워 주신 것 감사합니다.

오래 오래 사셨어야 했는데

여보 고마웠어.........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