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여행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신경숙

마음의행로 2010. 6. 10. 09:41

  어느날 밤이었어.

크리스토프가 깊은 잠에 빠져 있다가 희미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네.

이 한밤중에 누군가 싶어 문을 열어 보았으나 아무도 없었어,

어두움 뿐이었지.

문을 닫고 들어와 다시 잠자리에 들려고 하니

또 크리스토프 !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

다시 나가 보았으나 마찬가지로 짙은 어두움 뿐이었네.

세번째 부르는 소리는 바로 곁에서 들리는 것 같았어.

 

사방을 둘러보고 집 바같으로 나가 강으로 갔지.

어둠 속의 강가에 한 아이가 서 있었어. 아이는 오늘 밤 안에 강 저편으로 건너가야 한다면서

크리스토프에게 강을 건너게 해달라고 부탁했지.

 

아이의 청이 간절해 크리스토프는 깊은 밤이긴 하지만 이깟 아이쯤이야!

여기며 아이를 어께에 태우고 강물 속으로 들어갔다네.

그런데 크리스토프가 강물 속으로 들어가지마자 강물이 불어나기 시작했네.

순식간에 장신의 크리스토프 키를 넘을 지경으로 강물이 범람했지.

뿐인가.

처음엔 가벼웠던 아이도 강물이 불어남에 따라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어.

아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거대한 철근 같은 무게가 크리스토프의 어께에 내려 앉았지.

강물은 점점 불어나고 아이는 엄청남 무게로 그를 짓눌렀다네.

그토록 자신만만하던 크리스토프는 처음으로 자신이 강물에 빠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어.

 

삿대로 겨우 균형을 유지해 가며 아이를 어께에 태운 채 불어난 강물을 헤치고

간신히  강 저편에 이르렀지.

강가에 아이를 내려 놓으며 크리스토프가 말했네.

"너 때문에 내가 죽는 줄 알았다. 너는 이리 작은데 너무 무거워서 마치 이 세상

전체를 내 어께에 지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 머물면서 지금껏 수많은 사람들을

강 이편으로 건네주었지만 너보다 더 무거운 사람을 실어나른 적이 없구나".

 

그 순간이었네.

아이는 사라지고 눈부신 빛에 둘러싸인 예수가 눈앞에 나타났지.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네.

 

"크리스토프" 그대가 방금 짊어진 건 어린아이가 아니라 바로 나, 그리스도다.

그러니 그대는 저 강물을 건널 때 사실은 이 세상 전체를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라고

윤교수는 말을 끊고 학생들을 둘러 보았다.

 

우리가 이야기를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가늠해 보는 것 같았다.

아니다. 어쩌면 윤교수 자신도 잊고 있었던 크리스토프를 재발견한

느낌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잠시 침묵을 지킨 후 윤교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기로 하지.

지금 이곳에 있는 여러분 각자는 크리스토프일까. 아니면 그의 등에 업힌 아이일까?

수업이 끝나길 기다리는 부산한 움직임 속에서 한 방울의 빗방울 처럼 시작되었던 윤교수의 이야기는

우리를 한낮에 쏱아진 소나기를 훔씬 맞고 있는 느낌 속으로 이끌었다.

누군가 굳게 닫아놓은 강의실 창문으로 여름이 지나가고 있는 청명한 햇살이 스며들었다.

 

윤교수가 넌지시 우리를 살폈지만 윤교수의 질문에 뭐라고 대답을 하는 학생이 우리 중엔 없었다.

햇살을 따라 집회장에서의 구호도 다시 우리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안경넘어 윤교수의 예민하고 부드러운 눈이 우리 하나하나를 응시하며 스쳐 지나갔다.

 

-여러분은 각기 크리스토프인 동시에 그의 등에 업힌 아이이기도 하다.

여러분은 험난한 세상에서 온갖 고난을 헤쳐나가며 강 저편으로 건너가는 와중에 있네.

내가 이 이야기를 한 것은 종교 얘기를 하고자 함이 아니야.

우리 모두는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너가는 여행자일쎄.

 

그러나 물살이 거쎄기 때문에

그냥 건너갈 수 없어. 우리는 무언가에 의지해서 이 강물을 건너가야 해.

그 무엇이 바로 여러분이 하고자 하는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들이기도 할 테지.

지금 여러분은 당장 그것이 여러분을 태워서 저쪽 언덕으로 건너가게 해주는 배나 땟목이 되어

줄 것으로 생각할 거야.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것이 여러분을 태워 실어나르는 게 아니라

반대로 여러분이 그것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너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이 역설을 잘 음미하는 학생만이 무사히 저쪽 언덕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네.

여러분에게 문학이나 예술은 여러분을 태워 강 저편으로 건네주는 것만이 아니네.

여러분이 신명을 바쳐 짊어지고 나가야 할 필생의 일이기도 한 것이네.

 

그 순간엔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학생들은 없는 것 같았다.

윤교수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건조하게 우리의 마음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 순간엔 누구도 강의실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강의실 뒷자리의 그도 연필을 돌리지 않았다. 그녀도 가만히 얼굴을 든 채 윤교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여러분은 각기 크리스토프들이네. 강 저편으로 아이를 실어나르는 자들이기도 하지.

거대하게 불어난 강물 속에 들어가 있는 운명을 지닌 자들이란 말이네.

강물이 불어났다고 해서 강 저편으로 아이를 실어나르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되네.

 

강을 가장 잘 건너는 법은 무엇이겠는가?

 

질문이지만 질문이 아니었다.

윤교수의 목소리는 더욱 나직해 지면서 힘이 가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