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글

지우개

마음의행로 2016. 4. 2. 14:33

교회를 다니면서 성경을 다 읽어는 보았으나

전체를 써보지는 못했다

어느날 친구가 6개월만에 다 썼다고 했다

직장 생활 졸업하고 갑자기 생긴 빈 공간이

너무커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하다가

시작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고 했다

바로 나를 두고 하는 말인듯 하다

그 친구는 교회 나간지 1년도 안 되어

성경을 다 썼다 하니

많이 부러웠다

후배가 프랑스 출장갔다가 준 선물이 있다

이걸로 결제 싸인 멋있게 하십시요

몽불랑 만년필이었다

그때는 좀 유행을 탓던 선물이었다

뚜겅 끝 둥근 부분에 하얀 눈이 덮여 있는

모습은 몽불랑을 그대로 보여 주는

상징을 잘 묘사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상품에는 그런 멋진 아이디어

상품은 없는 걸까??

백두산의 천지의 물을 고급스럽게 표현하여

맛든 상품이 있다면 어떨까 생각도 하여 보았다

잉크가 필요했다 그리고 노트도 필요 했고

문방구 점을 찾아 들어가서 좀 고급스런 노트를

스무 권을 샀다

아마 이것이면 가능하리라

한 쪽 면만을 쓰기로 한 것이다

잉크를 고르려고 하니 내 만년필을 보시더니

몽불랑에는 당연히 몽불랑 잉크를 쓰셔야지요

하고 찾아 내어 나오신다

성경을 쓰려고 하니

좋은 노트, 좋은 만년필에 좋은 잉크로

쓰려고 하는 욕심에 사로 잡혔다

꼭 무슨 일을 하면 폼을 잡고 시작하려는

나의 습관이 여기서도 도졌다

글씨체를 어떻게 할까?

변함이 없는 것이었으면 좋으련만

생각을 하여 보았다

군대 생활 초년에 가면 글씨체를 보기 위해

종이를 주고 써 놓은 글을 그대로 써보라

시킨다

글씨를 보고 서기병이나 교육계에서

자기 부서로 데려가기 위해서다

그래서 나는 교육계로 불려 갔다

거기서 처음으로 군 교육용 차트를

쓰는 차트사가 되었다

매직으로 네모 반듯하면서도 글자 크기가

일정하고 안정감이 있는 글자체를 배웠다

첫 날부터 칭찬을 받았다

물론 빨리 가르쳐 자신이 좀 편하도록

후배에게 빨리 물려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게다

그 생각으로 글씨체를 그에 준하는 형태로

쓰기로 결정을 하였다

한편 나는 감사를 했다

후배가 사다 준 만년필에는 선배님이

잘 되어서 만년필로 멋지게 기안 문서에

싸인을 하라는 뜻이 들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나는 그랬었다

고맙지만 나는 그런 표면적인 모습에 나를

들여 놓지 않을거라고,

그리고 한참이 지난 세월 후인

이 번 기회에 더 좋은 곳에 귀한 시간이 머무는 곳에

그 만년필이

쓰임을 받게 되었다는 점에

후배에게 감사를 드리면서

1년 4개월만에 성경을 모두 써넸다

인내심도 길러졌고 성경 전반에 걸친 내용을

재 음미하는 시간이 되었고

무엇 보다도 죽음에 대한 염려나 공포가

차분하여 졌다

이 번에는 다시 두 번째 쓰기를 시작했다

노트는 작고 도구는 연필로 노트 양면을

사용하여 부피를 줄이도록 하였다

만년필을 사용하면 어려운 점이 많았다

고쳐 쓰려면 그 장을 찢거나 그곳을 날려버리는

표시 싸인을 두거나 하는 등 불편이 많않다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손자가 놀러 왔다가 내 노트에 낙서를 해 놓았다

그래도 문제가 되질 않았다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쓰면 그만이다

가르쳤다

연필 글씨를 문지르면 글씨가 없어지는 것을

지운다고 라고 하고

그리고 지우는 것을 지우개 라고,

과거를 지울 수도 있다

그자리를 지우고 다시 쓸 수도 있다

정정이나 지우는 표시를 할 필요도 없다

지우고 싶은 과거가 누구에게나 있는 법

그래 나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만나기도 어렵고 만날 수도 없고

미안함을 전달 할수도 없는그때 일

모래 위의 글이 아닌 바위에 새긴 글자

기도로 지우려고 한다

그 기도가 지우개가 된다면 좋겠지만

그러나 더 선명하여지고

밝아진다

마음 판에 새겨진 그 상황과 말은

잉크로 써진 성경과도 같다

그 영상은 절대 지워지지 않는 몽불랑 글씨이다

어릴적에 쓰던 몽당 연필 모나미 볼펜 껍질에

끼워 쓰던 연필은 다시 쓰는 성경책

기록용 매체가 되었다

쓰기 쉽고 오래쓰고 글씨체도 예쁘고

지울 수도 있고 고쳐 쓸 수도 있고

값도 싸고 변할 염려도 없는 연필 글씨를

지울 수 있는 지우개

세상사 고통 스러운 일 잊고 싶은 일

부끄럽기도 하고 못나 보이기도 한 일

돌아간다면 다씨 쓰고 싶은 일

추가 하고 싶은 말들

바위에 새김 같이 판에 새긴 글씨를 지울 수 있는

편리한 지우개 앞에서

이 글을 시작했다

지우개야 지워 써도 되지만

이젠 지우지 않아도 돼

써진 그대로가 난 좋아졌어

잘못 썼어도 비뚫어 졌어도 고치지 않아도

쓰디쓴 글씨도 토할 것 같은 글씨도

가벼운 감기가 들어 있는 글씨도

지금은 상의 용사가 되어 있는 글씨도

어린아이 같은 말을 쓴 글씨도

이젠 다 좋아졌어

생긴대로 살아 온 대로 입고 있는 대로

보이는 대로

고목 같은 인생이 나는 지금 더 좋아

바람에 가지도 찢겨졌고

병충해에 잎이 말랐고 어느 등산객이 팔을

부려뜨렸어도 폭풍우가 나를 괴롭혔어도

내 팔이 휘어지고 등이 굽고 굴곡이 졌어도

가지가 메마르고 키도 작아졌고

기름기도 마르고 쭈그러져 가는 모습도

내 속에 병이 있어 아픔이 있어도

내가 좋아 내 몸에 붙어 노래하는

매미 소리의 추억에 귀 기우리며

절대 내 인생을 다시 쓰고 싶지 않아

그대로가 너무 좋아

지우개야 오늘부터

넌 필요가 없어졌어 고치지 않고

또 쓰면 돼

지금 이대로는 또 좋은 나의 모습이 될거야

역사가 있고 관록이 있고

묵은 떼가 뭍어 있는

지금 이대로 가는 모습

미안하다 지우개야

널 다시 필통 속에 넣어두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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