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 11

선지국

*선지국 가난했던 끼니를 살아냄은 부쩍 자라나는 가족 먹성을 버티었다 마지막 피 한 방울 선지 신에게 바친 피의 제사였네 헌신이란 헝겊 조각은 내를 잘라 꿰매어 누굴 살려 내는 일 소머리 고기 꼬리곰탕 사골국 우족탕 갈비 내장탕 곱창구이 가죽 구두 마지막 선짓국을 받아 들고도 미각을 말하는, 헌혈 차량 빙 돌아 비켜 갔던 속내 그 이바지를 생각하면 송곳 해 지는 머리

시 글 2022.09.22

*보내드릴 참입니다

내 생각을 가져간 사람이 있습니다 나에게 아무 것도 해 줘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생각을 집듯이 가져갈 수 있나요 생각이 물건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편해집니다 주는 선물이 곱습니다 먹을것도 음악도 시집 한 권도 될 수 있어서지요 돌아오지 않으니까요 달이 호주머니로 오지 않고 보낸 연애 편지는 다시 우체부가 들고오지 않는 것처럼 오늘 이 가을도 다 좋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나의 시신에게 생각을 보내는 어떤 사람처럼 그러고 보니 물건을 생각이라 했던 생각이 아주 잘못 되었네요 시신이 물건이라니 무례일 것 같네요 죽어 있는 것을 보내는 건 가볍네요 물건이라서 살아 있는 건 보낼 일이 아니로군요 시신이 되고 말거니까요 내 생각을 가져가신 분 내가 보낸 분이 아니라 가볍게 회상만 해도 되는 분이라 가을처..

시 글 2022.09.20

우주의 술

나는 이름에 석과 율이 들어간 이름을 좋아했다 가장 안 좋아하는 천 자었는데 그게 내 이름에 들어와 있다 친구가 너의 이름을 보면 늘 감동해 우주를 움직일 것 같은 그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그는 나를 따라 술꾼이 되었다 일찍 죽었다 술 한 잔도 마시지 않는 나 그는 우주의 20 년 전 술을 어제도 마셨다 술이 내려왔다 둥근 지붕 위로 줄줄줄 형석을 만나는 날이었다

시 글 2022.09.18

처음

땅에 다리가 있는 걸 처음 알았어 신발을 신었고 보폭도 있었다 바람이 맞서면 주춤거렸고 뒷바람이면 빨랐다 느려질 때면 날이 더웠고 빨라지기 시작하자 가을이 왔다 키를 가졌고 몸도 가지고 있었다 보폭과 속도가 나와 똑같았다 힘이 들자 천천히 걷는다 텁석 주저앉자 같이 주저앉는다 앉아서 너 저리를 떨자 땅도 그리한다 재미있음은 같은 신발을 신었다는 점이다 오른발 왼발 바꾸거나 거꾸로 신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물며 군에 갈 때도 바꿔 신지 않았다 땅에 앉아 동구라미를 그렸다 똑같은 크기로 그린다 자전의 습관인지 들여다보았다 오늘은 언덕을 올랐다 언제 왔는지 내 발 밑에 와 있다 그림자가 말한다 나하고 두 분이 똑같네요 나는 말한다 넌 날궂이 하면 숨는 버릇이 달라 같은 거리를 터벅거렸다 종일 집으로 가기 ..

시 글 2022.09.13

판옥선(이순신)

역사는 흐린 낯으로 떠 내려갔나 목을 내놓은 사명은 하늘에 닿아 뜻을 헤아린 해구는 방패처럼 몸을 던져 막아섰고 바람 한 결 구름 한 점 허위 됨 없이 머물러 주었다 물결 일어서서 바다를 갈랐다 떨쳐나선 백성은 칼 창에 찢겨도 나라 앞에 성이 되어 돌이 되어 함성이 되어 피로 던져 외침의 낙엽이 될지라도 옥하나 둘러싼 사각은 돌과 물과 초록을 견디었다 언제나 그러듯이 깃대를 잡으려는 빈 입은 후대에 넘어졌고 곧은 붓은 첩으로 남아 아무도 막지 못할 역사를 새겼다 충은 누구도 두려운 법 그 거침 앞에서 비켜 서려는 간신들 판옥선은 떠 구멍 속에서 지켜보고 있다

시 글 2022.09.07

잠실 주공 2단지

네 시경에 오실 수 있으세요 시간은 목이 매이게 된다 빨래를 걷다가도 짓는 밥이 뜸이 들다가도 투벅투벅 신발 끌리는 소리가 동공에 밟힌다 양손 집게에는 8장의 연탄이 빠득빠득 쌓여 올려진다 5층은 중력과 거리와 시간이 지폐과 바뀌는 높이 4층과 5층은 검은 머리와 힌 등뼈가 걸쳐 있었다 갑자기 5층이 1층과 하나가 되었다 검은 가정이 보였다 그때부터 아린 꿈트림 1층은 무릎이 우는 습관을 꺼낸다

시 글 2022.09.04